Deleuze&Guattari(1980/2001) 천개의고원의 10장 '1730년 – 강렬하게 되기, 동물 되기, 지각 불가능하게 되기' 를 읽고 4월 5일까지 글에 대한 질문 2-3개를 이 글에 대한 댓글로 올려주세요.
(책이 없으신 분들을 위해 읽기자료 게시판에 PDF를 올려 두었어요)
질문은 어떤 질문이든 괜찮습니다. 남들에게 멋져보이는 질문 말고, 진짜 내가 궁금한 질문, 다른 사람들과 함께 이야기 나눠보고 싶은 질문을 올려주세요. 이게 도대체 무슨 말인가요 하는 질문도 또 자신의 관심분야와 접속시켜 좀 더 멀리까지 연결 해 본 질문도 좋습니다. 부끄러운 마음으로 쓴 이상하고 솔직한 모든 질문들을 환영합니다~!!
질문을 올릴 때에는 글의 어떤 부분에서 생긴 질문인지 알 수 있도록 그 맥락을 질문에 포함해 주세요.
가령, 몇 페이지 어디에서 저자들이 뭐라뭐라고 하는데~ 하는 식으로 그 질문이 나온 맥락을 간단히 정리한 다음 자신의 질문을 적어주시면 이야기 나눌 때 더 좋을 것 같습니다~
올려주신 질문들은 익명으로 모아서 모임 당일 대화에서 활용할 예정입니다.
다양체들은 현실이며, 어떤 통일도 전제하지 하지 않으며, 결코 총체성으로 들어가지 않으며 절대 주체로 되돌아가지도 않는다고 들뢰즈는 말한다. 다양체를 아이들로, <이것임>이라는 다양체의 사건들을 아이들의 삶으로, 매끈한 공간과 시간이라는 다양체의 시-공간을 아이들이 살아가는 사회로 대응하여 생각해 본다면? 교실이라는 시-공간의 또하나의 다양체인 교사는 리좀을 형성하는 다양체의 조성판인 수업에서, 어떠한 '~되기'들로 고원을 가로지르며 영토들과 탈영토화를 넘나들 수 있을까? 모두를 위한 교육과정에 도달할 수 있을까?
수업에서 교사-학생, 혹은 교사교육자-예비교사의 '되기'는 어떠한 모습으로 가능한가? 수업의 '대화' 속에서 일어나는 들뢰즈 가타리의 '되기'를 감각 해 본다면? 혹은 되기를 가능하게 하는 수업, 수업의 대화는 어떤 움직임일까?
1. 진정한 -되기란 무엇일까?
그냥 모방하는 것도 아니고 동일시하는 것도 아니고 연민의 감정을 갖는 것도 아니고 구조적 유비를 제안하는것도 아니다. 뭐가 진짜 00되기가 아닌지는 명확하게 설명을 잘 해줬는데 그럼 뭐가 진짜 00되기인지는 잘 모르겠다.
2. - 되기를 하면 뭐가 좋을까?
3. 학교에서 어린이 되기를 하고자 하는 교사는 어떤 식으로 이걸 시도할 수 있을까? 나는 개 되기, 동물 되기, 벌레 되기, 식물 되기, 퀴어 되기, 불구 되기도 하고 싶은데 어떻게 할 수 있을까?
‘-되기’가 어떤 상태인지 사실 선명하게 머릿속에 그려지지 않는다. 만약 내가 동물-되기를 연습한다면 무엇을 시도해야할까?
탈주하고 싶은 무언가를 -되기의 상대항으로 지정하면 되는걸까?
궁극적으로 조우하는 모든 것들과 -되기를 시도해야 하나?
다양한 되기를 통해, 나의 내부로부터 탈주로를 만들게 된다면 나는 어떤 상태일까?
529p "여성-되기가 첫번째 양자 또는 분자적 절편이며 동물-되기가 이것과 연결되어 있다면, 이 모든 생성들은 도대체 무엇을 향해 돌진하고 있는 것일까? 의문의 여지없이 지각할 수 없는 것-되기이다. 지각할 수 없는 것은 생성의 내재적 끝이며 생성의 우주적 정식이다. ………… 그러나 여성되기에서 시작해서 모든 분자-되기의 끝에 있는 지각할 수 없는 것-되기는 과연 무엇을 의미할까? 지각할 수 없는 것 되기는 많은 것을 의미할 수 있다. 지각할 수 없는 것(탈기관적인 것), 식별 불가능한 것(탈의미적인 것) 그리고 비인칭적인 것(탈주체적인 것)은 어떤 관계에 있을까?"
현대사회 시스템에 의해 통제되는 사람들, 나도 그 시스템에 통제되는 삶을 살았고 다른 사람들을 통제하는 역할을 하기도 했었다. 지각할 수 없는 것 되기는 그동안 사회 속에서 살아오면서 내가 가지게 된 다양한 생각의 틀을 벗어나는 것인가…… 나의 정체성을 넘어서기 위해 …… 천개의 고원에서 이야기 하는 (530~532p) 흠뻑 적시기, 없애버리기, 모든 것을 놔두기란 무엇인가?
2. 552p 여성은 여성-되기를 해야만 한다. 하지만 전 남성의 여성-되기 속에서 그래야 한다. ………소수자 되기는 자신의 요소들인 탈영토화된 매체와 주체를 통해서만 존재한다. 생성의 주체는 다수성의 탈영토화된 변수로서만 존재하며 생성의 매체는 소수성의 탈영토화하는 변수로서만 존재한다. 우리를 하나의 생성으로 몰아가는 것은 그 어떤 것일 수도 있다. 전혀 예기치 않았던 것일 수도 있고, 전혀 중요하지 않은 것일 수도 있다. 점점 커져서 당신들을 사로잡아버리는 작은 디테일 없이는 당신들은 다수성에서 이탈하지 못한다.
-Everything Everywhere All at once 라는 영화에서 노래방 기계를 산 것에 대한 세금 처리 문제가 점점 커져서 자신의 삶을 부정 받는 듯 하고 딸과 함께 했던 행복했던 시간들은 사라지고 딸의 동성애를 인정하는 문제가 자신의 젊은 시절 아버지로 버림받은 과거에서 오는 자존감 문제까지 넘어가며 에블린을 사로잡아버린 것이 작은 디테일의 예라고 할 수 있을까?
3. 557p 어떤 체계 안에서 선들이 좌표로 여겨지거나 위치를 정할 수 있는 연결로 여겨지는 경우 이 체계를 점의 체계라고 부를 수 있을 것이다. 가령 나무형 체계, 그램분자적 체계 또는 기억의 체계는 점의 체계이다. ……… 교육학, 즉 기억술을 형성하는 기술을 표상할 때면 이 기본 도식이 발견된다.
576p “생성은 모방이 아니다.” 히치콕의 새(강령함들의 장, 진동하는 파동, 또는 연속된 변주처럼 또 우리가 우리 안에서 느끼는 무서운 위협처럼 전자음을 생산한다), 하모니카를 불다가 말이 된 알렉시스(578p) 등의 예들을 볼 때 지금까지 학교에서의 교육은 생성이 아니라 모방이고 지층화하는 것이었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래서 이러한 되기의 철학이 학교의 교육과정 속에 녹아들기 위해 어떤 것들이 필요할까?
"당신이 <이것임>의 존재를 인정하게 되면, 당신은 자신이 <이것임>이고 그 외의 어떤 것도 아니라는 것을 알아채게 될 것이기 때문이다... 당신들은 경도와 위도이며, 형식을 부여받지 않은 입자들 간의 빠름과 느림의 집합이며, 주체화되지 않은 변용태들의 집합이다." (p. 497)
내가 그저 '이것임'을 인정하게 될 때, 내가 경도와 위도에 지나지 않고 형식을 부여받지 않은 입자들 간의 빠름과 느림의 집합이라고 받아들이게 될 때, 교사/연구자/엄마/아내/여성/학부모/한국인'으로서' 내가 학습하고 형성해온 자아에 대한 감각이 어떻게 달라질까? 그러한 변화는 무엇을 가능하게 할까? 그것이 단순히 '정신 승리'가 아니라 담론화-물질화를 낳는 무언가라고 가정한다면, 이 세계의 '되기'의 족적을 바꿀 수 있을텐데 그것을 촉발시킬 수 있는 내 일상의 실천의 예에는 무엇이 있을까? 엄마'로서' 아이한테 했던 많은 이야기와 행동들이 달라질까? 연구자'로서' 교사'로서' 했던 많은 행위들이 달라질까? 어떻게? 주체화를 포기한 교육의 모습을, 연구의 모습을 어떻게 상상해볼 수 있을까?
들뢰즈는 누군가 혹은 무언가를 모방하는 것, 즉 그저 '따라하는 것'과 '되기'를 구분하고 후자에 힘을 실어 이야기한다. 파농의 책이 떠오르는데, 파농은 colonizer의 언어였던 프랑스어를 유창하게 수행한 마르티니크 유색인의 모습에 주목하면서 언어라는 것이 식민주의와 어떻게 맞닿아 있는지 이야기한다. 호미 바바는 이것을 더 밀고 나가는데, 식민지 언어를 유창하게 사용하는 그 마르티니크인이 식민주의 담론을 어떻게 해체하는지 분석한다. 즉, '모방하기' 혹은 '따라하기'가 동일성의 논리를 토대로 형성되고 발전된 식민주의를 어떻게 혼종화시키고 그러한 혼종성이 갖는 힘이 무엇인지에 대해 논의한다. 호미 바바의 관점에서 볼 때에는 '따라하는 것' 역시 '되기'의 일부이다. 들뢰즈는 어떠한 이유에서 모방과 되기를 구분했을까? 모방이라는 것도 되기를 촉발시키는 힘이 있지 않을까? 내가 오해하거나 이해하지 못하고 있는 것은 무엇일까?
들뢰즈와 가타리의 글을 읽으면서 가장 어려운 점은 유기체를 기관 없는 신체로, 인간을 기계로 사유하도록 독자들을 이끄는 점이다. 직관적으로 이해하기 어렵고 그래서 온 몸으로 받아들이기가 굉장히 힘들다. 들뢰즈와 가타리의 논지를 따라가다보면 '인간'이 그리 특별한 존재가 아님을, 그저 경도와 위도일 뿐이고 형식을 부여받지 않은 입자들의 속도라는 것임을 알게 된다. 최근 불교철학에 대해 읽고 있는데, 불교에서도 들뢰즈 가타리와 굉장히 비슷한 이야기를 하지만 '인간'의 관점에서 이해할 수 있는 이야기를 한다(예를 들어 '무아'라는 개념). 불교 철학이 인간을 중심에 두지 않을 뿐더러 탈인간중심주의와 맞닿아 있는다고 평가받는 점에서 볼 때, 불교 철학의 탈-주체성 논의가 들뢰즈 가타리의 그것과 다른 점이 흥미롭다. 들뢰즈와 가타리의 철학이 서구 전통의 인간/비인간, 유기체/비유기체, 언어/물질의 이분법적 구분이 갖는 영향력이 너무나도 큰 맥락에서 나온 까닭일지? 불교철학에 대한 글과 들뢰즈와 가타리의 글을 횡단하며 읽었는데, 그 차이가 굉장히 흥미롭다.
어느 (이도 저도 아닌) 얼치기의 회상: 변방 혹은 가장자리에서 나고 자랐다고 생각하면서 늘 중심에 눈을 돌리고 있었다. 이도 저도 아니면서 여기에도 저기에도 기웃거렸다. 할 줄 아는 건 기웃거리는 것밖에 없으면서 기웃거리는 거 빼고 다 한다고 생각했다. 나 말고 다른 누군가가 거친 들판에 선 악마가 '되기'를 바랐지만, 나는 그리 되지 말았으면 하고 바랐다. '-되어야 할 것'과 '-되어야 될 것'들을 오가면서 결국은 '-되기'를 밀어내고 말았다. 내게 남아 있는 것은 '-되기'로 포장되기를 바라는 '흉내내기'와 자유주의적 허탈감이었다.
어느 가부장의 회상: 가부장이 싫었다. 실재하는 가부장도, 제도화된 가부장도 싫었다. 싫다고, 나쁘다고 말해야 한다고 배웠고, 관념적으로는 그렇게 하기도 했다. 그럼에도 저항하거나 거부할 수 없었다. 저항과 거부에 따르는 비용이 엄청나다고 생각했다. 거기에 젖어 있었기 때문에 생각이라는 것을 할 필요도 없었다. 어느 새 돌아와 마주하게 된 거울에는 형체 또렷한 가부장이 들어 있었다. 가부장이면서 '가부장 아닌 것 되기'는 실재할 수 있는가? 그렇게 하기 위해서 넘어서야 할 문턱은 무엇인가? 그 문턱에 도달하기 위해 연결-접속해야 할 것들은 무엇인가? 어쩌면 수없이 많은 만남과 인연 속에서 그 문턱 근처에 다다를 수 있었지만, 애써 외면한 것은 아니었는가?
1“나이를 먹을 줄 안다는 것은 청춘으로 머문다는 것이 아니다. 그것은 자신의 나이로부터 이 나이를 구성하는 입자들, 빠름과 느림, 흐름들을 추출하는 것이다”
🖊️나이를 먹을 줄 안다는 것은
물리적 나이에서 주체적인 나의 나이로
빠름과 느림, 흐름들을 추출하며
나 답게 내가 누군지에 대한 답을 하며
그렇게 산다는 게 아닐까. 늘 먼 곳의 이야기만 하다 들뢰즈와 가타리가 처음으로 삶에대한 이야기를 하는 것 같아 눈이 머물렀던 부분.
2(인상깊었던부분)-되기란 대체 무엇인가에 대한 이야기. 되기와 비슷한 말 혹은 그 과정으로로 10장에서는 ‘운동과 정지, 빠름과 느림, 원자의 조합, 입자의 방출, 이것임, 생성, 탈주, 기관없는 몸체, 세상 모든 사람되기, 하나의 세계 만들기, 모든 것을 놔둘것’ 등의 이야기를 하였다.
그리고 동물되기를 말하며 -되기를 위한 조건. 혹은 방법
‘-라고 생각하는 것, -를 좋아하는 것, -와 연결 되어있다고 느끼는 것, -충분한 열의와 필요와 합성을 가지고 짖는 것’
결국 출발은 진심어린 마음에서 부터가아닐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