Deleuze & Guattari(1980/2001) 천개의고원의 12장 '유목론 또는 전쟁기계' 를 읽고 6월 7일까지 글에 대한 질문 2-3개를 이 글에 대한 댓글로 올려주세요.
(스캔본 읽기자료 게시판에 올려두었어요~!)
질문은 어떤 질문이든 괜찮습니다. 남들에게 멋져보이는 질문 말고, 진짜 내가 궁금한 질문, 다른 사람들과 함께 이야기 나눠보고 싶은 질문을 올려주세요. 이게 도대체 무슨 말인가요 하는 질문도 또 자신의 관심분야와 접속시켜 좀 더 멀리까지 연결 해 본 질문도 좋습니다. 부끄러운 마음으로 쓴 이상하고 솔직한 모든 질문들을 환영합니다~!!
질문을 올릴 때에는 글의 어떤 부분에서 생긴 질문인지 알 수 있도록 그 맥락을 질문에 포함해 주세요.
가령, 몇 페이지 어디에서 저자들이 뭐라뭐라고 하는데~ 하는 식으로 그 질문이 나온 맥락을 간단히 정리한 다음 자신의 질문을 적어주시면 이야기 나눌 때 더 좋을 것 같습니다~
올려주신 질문들은 익명으로 모아서 모임 당일 대화에서 활용할 예정입니다.
P.681 클라이스트에게서 가장 기묘한 현대성을 발견할 수 있는 것은 어찌된 일일까? 비밀과 속도 변용태가 그의 작품의 요소들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클라이스트에게서 비밀은 내부성의 형식에 포함되어 있는 내용이 아니라반대로 자체가 형식이 되며 항상 자기 외부에 존재하는 외부성의 형식과 일치한다. 이 내용에 뒤이은 패거리 문화에 대한 이야기가 인상적이었다. 학교 단위의 고집스런 행정이나 바뀌지 않을것 같은비합리적 관행이 새로 들어온 친한(?)무리의 불만의 표출로 인해 바뀔때가 있다. 이러한 것들을 비밀과 속도 그리고 변용태에 연결시켜 볼 수 있을까?
P.767~768 배치는 정념적이며 욕망의 편성이다. 욕망은 자연적이고 자발적으로 결정되는 것이 아니라 배치하고 배치되는 것이자 기계적인 것이다. .....무기는 일시적인 수단에 불과하고 이러한 배치의진정한 목적은 변용태의 역량을 육성하는데 있는것처럼 말이다. 스스로 탈각하는것 자기를 비우는 것을 배우는 것이야 말로 전쟁 기계의 고유한 속성이다. 이것은 전사의 무위 이며 주체의 해체인 것이다. 알 듯 모를 듯한 이야기지만 매우 흥미롭다. 자기를 비울 수 있는 변용태의 역량이 배치를 통해 욕망의 편성을 바꿀 수 있다는 이야기로도 이해된다. 하지만 자기를 비우는 교육보다 욕망의 억압을 배운것 같다. 이러한 매카니즘을 교육이나 연구에서 실천한 사례가 있다면?
전쟁 기계는 첫번째 극에 비하면 무한히 작은 “양”을 지니며, 전쟁이 아니라 창조적인 도주선을 그리는 것, 매끈한 공간을 그리고 이 공간 속에서 인간의 운동을 위한 매끈한 공간을 편성하는 것을 목표로 한다. 810p > 매끈한 공간을 편성한다는 것은 무엇을 의미하는 걸까? 그리고 인간의 운동을 위한다는 것은 무엇을 의미하는가?
예술적, 과학적, “이데올로기적” 운동도 잠재적인 전쟁 기계가 될 수 있는데, 다름 아니라 문과 연동되면서 고른판, 창조적 도주선 또는 이동을 위한 매끈한 공간을 그리는 정도에 따라 그러한 기계가 될 수 있는 것이다. 811p > 어떠한 예술이 창조적 도주선 또는 이동을 위한 매끈한 공간을 그렸는가? 이 질문에 대해 몇 가지 떠오르는 작품이 있다. 다른 분들의 생각도 듣고 싶다.
1. p.718-721에는 국가와 사유의 관계에 대해서 나온다. 국가나 어떤 기관이 어떤 철학을 가지면 좋은 거라고만 생각했었는데 그 둘이 합쳐지면서 어떻게 국가의 보편성이나 합법성의 허구를 고안해 낼 수 있는지가 흥미로웠다. 우리 사회/학교/국가에도 “보편적 사유” (722)의 역할을 하고 있는 사유들이 있을까? 어떤 것들일까?
2. 유목민은 떠나지 않으며 떠나기를 원하는 자들이고 움직이지만 실제로는 앉아있으며(p.731) 움직이고 있을 때가 가장 진득하게 앉아있을 때이며(p. 732) 절대적인 운동, 즉 속도를 갖고있다고 하는데 그것은 어떤 것일까? 우리는 언제 어떤 모습으로 유목민인가? 교사 혹은 연구자 혹은 다른 어떤 것으로서 우리는 언제 어떻게 어떤 속도로 정주민 혹은 이주민이 아닌 유목민으로 머물까/움직일까?
3. p. 749부터 나오는 <헤아리는 수> 를 이해하고 싶은데 어렵네요ㅠㅠ
4. 무기와 도구는 방향, 벡터, 모델, 정념이나 욕망의 음조의 관점에서 (p.773) 구분해 볼 수 있다. 하지만 어떠한 경우에도 무기체계를 만들어 내는 것은 배치(p.766)이고 특정 배치에 놓여있을 때 특수성을 발휘할 수 있다고 한다. 또 무기와 도구는 새로운 변신의 배치에서 다양한 결연 관계에 접어들 수 있으며(p.773) 양의적으로 둘의 공통의 도주선 위에서 인간은 동시에 무기를 찾고있고 도구를 원할 수 있다고 한다. 그리고 전사나 직공은 역사횡단적인 배치의 새로운 인물들, 즉 유목적인 전사와 이동하는 직공이 될 수 있다(p.775). 제대로 이해 한 건지 모르겠지만..ㅠㅠ 우리가 하고 있는 교육이든 연구이든 아니면 다른 어떤 것이든 국가 장치가 어떤 규율을 부여하고 체제를 획일화 하려 할 때 어떻게 우리는 도구가 아닌 무기를 만들고, 혹은 특정 배치에 놓인 무기-만들기를 만들수 있을까? 역사 횡단적으로 선을 가로지르고 넘는 배치의 새로운 인물이 되어 저항할 수 있을까?
저자들은 전쟁기계는 국가 장치 외부에 존재한다(671쪽)고 선언한다. 수목형 조직의 전형에 해당하는 국가와는 다른 구성원리를 가지고 있을 뿐만 아니라 국가의 형성과 유지, 존속을 불가능하게 하는 전쟁기계는 당연히 국가 장치의 외부에 존재함직하다. 그런데 여기에서 외부에 존재한다는 것은 어떤 의미인가? 국가라는 권력 장치가 영향력을 미치지 못하는 제3의 공간에 전쟁기계가 위치한다는 말인가? 국가의 형성 및 유지, 존속의 근본이 되는 원리를 따르지 않는다는 말인가? 전자로 보면 전쟁기계는 국가와 완전히 구별되는 개념이 되고, 후자로 보면 전쟁기계는 국가와 이분법적으로 구분되는 것이 아니라 정도에서 차이가 나는 연속적 개념이 된다. 국가 장치의 외부에 존재하는 전쟁기계는 실재인가? 지향인가?
저자들은 유목민들과 전쟁기계를 연결해 주는 역할로서, 국가장치와 유목민 사이의 어디쯤에 위치해 있는 대장장이에 주목한다. 대장장이는 유목민도 정주민도 아니며, 순회하는 자, 이동하는 자이고, 이들이 사는 공간은 정주민들의 홈이 패인 공간도, 그렇다고 유목민들의 매끄러운 공간도 아니라고 말한다(793쪽). 국가 공무원으로서, 국가에서 정한 교육과정에 따라 학생들을 교육하는 의무를 가지고 있으면서도 변혁적 페다고지를 꿈꾸고 실천하는 교사들은 어쩌면 대장장이의 역할을 수행하고 있을지도 모르겠다. 그런데 이와 같은 역할의 수행이 교육과정을 재구성하고, 사회변화를 위한 프로젝트형 수업을 실천하는 것으로 충족된다고 할 수 있는가? 이것마저도 버겁다고 이야기하는 교사들에게 이 이상을 요구하는 것이 가당키나 한 일일까? 근본적으로 이데올로기적 국가장치의 전형에 해당하는 학교와 교사를 대장장이로 간주하는 것 자체가 가당키나 한 일인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