Deleuze&Guattari(1980/2001) 천개의고원의 6장 '1947년 11월 28일 - 기관없는 몸체는 어떻게 만들어지는가?'(pp. 287-320)를 읽고 2월 2일까지 글에 대한 질문 2-3개를 이 글에 대한 댓글로 올려주세요.
(책이 없으신 분들은 빼꼼이 스캔해주신 읽기자료 게시판 PDF파일을 확인해 주세요~!)
질문은 어떤 질문이든 괜찮습니다. 남들에게 멋져보이는 질문 말고, 진짜 내가 궁금한 질문, 다른 사람들과 함께 이야기 나눠보고 싶은 질문을 올려주세요. 이게 도대체 무슨 말인가요 하는 질문도 또 자신의 관심분야와 접속시켜 좀 더 멀리까지 연결 해 본 질문도 좋습니다. 부끄러운 마음으로 쓴 이상하고 솔직한 모든 질문들을 환영합니다~!!
질문을 올릴 때에는 글의 어떤 부분에서 생긴 질문인지 알 수 있도록 그 맥락을 질문에 포함해 주세요.
가령, 몇 페이지 어디에서 저자들이 뭐라뭐라고 하는데~ 하는 식으로 그 질문이 나온 맥락을 간단히 정리한 다음 자신의 질문을 적어주시면 이야기 나눌 때 더 좋을 것 같습니다~
올려주신 질문들은 익명으로 모아서 모임 당일 대화에서 활용할 예정입니다.
1. 들뢰즈는 왜 기관 없는 몸체에 관한 위대한 책으로 스피노자의 <에티카>라고 말하는가? 들뢰즈는 왜 제도권에서 탈주하는 소수자이자 분열증자인 아르토나 베이컨에게 주목하는가? 아르토의 잔혹연극과 베이컨의 그림이 보여주는 기관 없는 몸체의 개념은 어떤 면에서 유기체라고 불리는 기관들의 조직화와 대립하고 있는가? 이들이 발명한 도주선에서 고른판에 도달하는 길을 어떻게 찾을 수 있을까? 안고른판의 현실에서 이들의 말하는 기관 없는 몸체로 다른 고원들과 어떻게 소통을 시작할 수 있을까?
2. 들뢰즈는 왜 기관 없는 몸체를 설명하며 마조히스트의 몸체나 마약 중독자의 몸체를 중심으로 말할까? 자본주의라는 지층에서 자아는, 고통의 양태를 생산하는 마조히스트의 기관 없는 몸체나 횡단적 연결접속의 따뜻함을 단절하고 차가움으로 도피하는 마약을 하는 몸체와 같을 뿐이어서, 자본주의 속에서 무한하게 이행하고 분할되며 기관 없는 몸체를 텅 비게 만들거나 암적인 몸체가 되는 위험에 직면해 있다는 것을 인지하게 하려는 것인가? 그렇다면 기관 없는 물체를 전체주의적이고 파시스트적인 암적인 몸체로부터 분리해낼 수 있는, 아르토가 말하는 탈지층화의 바리케이트와 가스가 될 수 있는 수단은 무엇일까?
cso는 기관의 반대물이 아니다. cso의 적은 기관이 아니다. 바로 유기체가 적인 것이다(304). 몸체는 몸체이다. 몸체는 혼자이다. 또한 기관들을 필요로 하지 않는다. 기관들의 유기적인 조직화와 대립하는 것이다. cso는 욕망이다. 사람이 욕망하는 것이 바로 cso이며, 사람들은 바로 이것을 통해서만 욕망한다(316). cso가 뭐지? 하지만 사람들은 이미 그것 위에 있으며, 벌레처럼. 그 위를 기어다니거나 장님처럼 더듬거리거나...(287) 라고 했는데, cso가 맥락마다 다르게 읽혔습니다. 이 책을 읽지 않은 누군가와 이 책에 대해 얘기하고 싶으면 cso와 기관, 몸체, 지층은 어떻게 보통의 언어(?) 로 얘기할 수 있을까요? 다른 분들의 해석된 말이 궁금합니다.
cso는 그것을 지층화 하는 표면들과 그것을 해방시켜 주는 판 사이에서 끊임없이 진동하기 때문이다(308). 우리는 사회 구성체 안에 있다. 먼저 우리에 대해서, 우리 안에서, 또 우리가 존재하고 있는 장소에서 그것이 어떻게 지를 보라....cso는 바로 이런식으로만 욕망들의 연결접속, 흐름들의 접합접속, 강렬함들의 연속체로서 진정한 모습을 드러내는 것이다(309).
결국 존재가 유기적인 조직화와 대립하지만(304) 동시에 접속이 필요하다는 것이라면 '조직화된'유기체와 접합접속, 강렬함의 연속체는 그 대상을 어떻게 구분할 수 있을까요?
1. 저는 이 글을 이해하지 못했습니다!!! 기관 없는 몸체가 뭔가요? 기관 없는 신체는 지향점일 뿐 실제로 그렇게 될 수가 있나요...? 모든 계급장 다 떼고 있는 그대로 존재하는게 기관없는 몸체인가요?? 아니면 진짜 몸에 대한 것이라기보다는 비유인가요?
암적인 CsO, 텅 빈 CsO가 아닌 CsO(313쪽), 고른판에 적합한 CsO(316쪽)는 어떤 모습인가요...기관 없는 몸체가 대체 무엇인가요.ㅜㅜ 자기 자신을 무엇으로 규정하지 않고 스스로에 대한 인식 없이 그냥 존재할 뿐인 아기는 CsO인가요?
2. 301쪽 "욕망이 쾌락을 규범으로 삼지 않는 까닭은 충족될 수 없는 결핍 때문이 아니라 이와 반대로 욕망의 긍정성, 다시 말해 욕망이 자신의 진행 과정에서 그리는 고른판 때문이다."
316쪽 CsO는 욕망이다~~
이런 걸 읽다 보면 욕망도 좋은 욕망이 있고 안 좋은(파괴적인 CsO를 만들어내는)욕망이 있다는 것 같은데, 그런 구분이 있는건지도 궁금하고 있다면 그 구분의 경계가 무엇인지 궁금합니다. 예를 들어 맛있는 것 먹고 싶은 욕망과 예쁜 신발 사고 싶은 욕망은 이 책의 세계관(?)으로 해석하면 뭐라고 설명할 수 있나요?
우아 너무 생소한 개념 대잔치라 질문을 하면서도 맞는 질문인지 모르겠어요(ㅠㅠ) 심지어 질문 남긴 게 어찌된 일인지 지워져서 다시 써야해서 더 슬프네요 ㅋㅋ
지난 달 모임에서 페미니스트, 퀴어, 장애에 대한 함께 나누었던 이야기들의 답을 들뢰즈CsO 개념에서 찾을 수 있었던 것 같습니다. 미리 정해진 목적 혹은 기능, 사회적 기대 혹은 규범 등에 의해 읽히고, 판단되고, 평가되고, 억압받는 것이 아니라 존재들이 끊임 없는 흐름, 생성, 연결 속에서 긍정될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갑자기(?) 후반부에 '암적 CsO', '텅빈 CsO'를 경계하는 부분에서 살짝 의기소침해졌습니다. (기세가 꺾인 듯한 기분이랄까요) 물론 극단적이고, 무분별하고, 자기파괴적인 욕망을 경계하는 것이라고 이해했지만, 여기서 '암적이다', '텅비었다'의 기준은 어떠한 방식으로 규정할 수 있을까요? 누군가의 기준이 욕망이 또다시 억압되는 게 아닐까요?
307쪽 의식을 탐구수단으로 만들려면 의식을 주체에서 떼어내어야 하고 무의식을 진정한 생산으로 만들려면 이것을 의미생성과 해석에서 떼어내야 하는데 분명 이것은 어려운 일이다. 교육은 특히 의미를 생성하는 곳이다. 교육에서 의미생성을 떼어낸다는 것은 어떤 것을 말하는 것일까?
309쪽 우리가 존재하고 있는 장소에서 그것이 어떻게 지층화되어 있는지를 보라. 그런 다음 지층들을 떠나 우리를 지배하고 있는 좀 더 깊은 배치물로 내려가라. 그리고 배치물을 가만히 움직여 고른판 쪽으로 이동시켜라. 303 고른판을 구성하기 위해서는 거대한 < 추상적인 기계> 가 필요하지 않을까? 추상적인 기계가 되는 의식의 흐름은 무엇일까?
1. p. 298에서 말하고 있는 욕망에 “내재하는 기쁨”, “어떠한 결핍도, 어떠한 불가능성도 내포하지 않으며, 쾌락으로 측정할 수도 없”는 욕망은 어떤 것이고 어떻게 경험될까? 들뢰즈 가타리는, 욕망은 “자신의 진행 과정에서 그리는 고른판 때문에” (p.301) 긍정성을 가지고, 쾌락을 규범으로 삼지 않게 된다고 한다. 쾌락은 “욕망의 흐름을 중단시키거나 이것을 세 가지 망상에, 즉 내적 결핍, 우월한 초월성, 허울뿐인 망상에 기대게 만드는 척도의 흐름”인데 이러한 쾌락을 “욕망 자체의 흐름, 즉 <내재성>의 흐름이 되도록” 해야한다고 한다 (p. 301). 혹시 쾌락이 아닌, 결핍을 채우려는 것이나 “외적인 또는 초월적인 기준”에(p. 302) 부합하려는 것이 아닌 욕망을 어떠한 형태로 가져본 적이 있다면, 그것은 어떤 욕망이었고 어떻게 경험되었는지? 그것은 어떤 의미의 “탈영토화의 운동”(p.302)이었다 생각하는지?
2. p. 303에는 서로 다른 CsO들의 “잠재적 집합”인 고른 판에 대한 이야기가 나온다. “각각의 CsO 위에서 생산된 강렬함들을 결합시키고 모든 강렬한 연속성들의 연속체를 만들어 낼 때” 가능한 고른판인 “고원”에 대한 이야기를 보고 이러한 고른판, 고원은 어떤 곳일까 생각해 보면서 지난 번 모임에서 이야기 한 퀴어와 불구가 생각났다. 이런 고원으로서의 세상은 바로 퀴어와 불구의 세상이 아닐까?!! 모두가 퀴어하고 모두가 불구여서 아무도 퀴어가 아니고 아무도 불구가 아니게 여겨지는 세상?! ‘우리가 모두 약간은 퀴어나 장애지’ 라고 하면서 여전히 퀴어나 장애를 정상성과 분리해서 말하는 세상이 아니고, 애초에 퀴어나 장애라는 개념이 없는 세상, 그냥 우리 모두가 다양한 조합의 CsO를 가진 “괴물 같은 잡종들”로 존재한다고 여겨지는 세상. 정상사회가 정한 특정 성별이나 성지향성, 몸이나 마음의 구조, 이름으로는 잘 분류되지 않는 다양하고 이상한 모습의 몸과 욕망의 조합들의 생김새를 모두 그대로 인정하고, 그에 대해 다양한 모습으로 서로 응답하며 살아가는 세상이 고른 판, 고원으로서의 세상이 아닐까? 이러한 세상은, 지금 우리가 가지고 있는 어떤 정상성의 기준에서 보는 퀴어와 불구의 욕망이 무언가 부족하고 비정상적이어서 나온 결핍이거나 사회의 기준에 도달하지 못한 무엇이라고 보지 않을 것 같다. 이 세상이 고른 판이라면 퀴어든 불구든 혹은 현재의 정상 신화에 의해 폭력적으로 어떤 이름이 붙여진 어느 누구든, 그들의 욕망은 “아무것도 결핍하고 있지 않으며, 따라서 어떠한 외적인 또는 초월적인 기준과도 무관“한 것이라는 걸 인정하는 곳이 되는 것이 아닐까? 지금 우리의 세상이 조금이라도 이런 세상이 되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 또, 하나의 CsO 자체가 바로 하나의 고원이라고 했을 때 그렇다면 하나의 몸인 나는 어떻게 그런 고원이 될 수 있을까?
3. 후반부에서 들뢰즈 가타리는 CsO들이 신중하지 못하게 만들어지는 것에 대해서 경고하면서 지층들, 혹은 토날들은 CsO 혹은 나구알이 생성되는 때에도 모두 파괴되면 안 된다고 한다. p. 313에서는 ‘우리 안에 있는 파시스트의 암적인 CsO가 되지 않고, 또 마약 중독자, 편집증 환자나 우울증 환자의 텅 빈 CsO도 되지 않으면서 CsO들을 어떻게 만들어 낼 수 있을까?’ 하는 질문이 나오는데, 나의 두 번째 질문에서처럼 어떤 CsO나 고원으로서의 퀴어 불구 세상을 만들고자 할 때 혹은 퀴어 불구 개념이 아니라도 어떤 식이든 그런 ‘고원’ 세상을 만들고자 할 때 그게 신중치 못하게도 지층들을 자살적 착란적 붕괴로 몰아가’ ‘지층들이 다시 우리를 한층 더 무겁게 짓누르게’ (p. 309) 되는 결과를 가져오지 않게 하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 가능한 구체적으로 상상해 볼 때, 어떤 특정 종류—퀴어 불구 아니면 또 어떤 다른 종류—의 고른판에 도달하고자 하는 실험에는 구체적으로 어떤 식의 신중치못함, 위험, 자살적 착란적 붕괴 가능성 등이 있는걸까? 우리는 어떻게 하면 암적인 몸체를 만드는 것에 빠지지 않으면서 고원을 만들 수 있을까?
4. CsO를 알이라고 이야기할 때, 특히 CsO가 “유기체 ‘이전’에 있지 않다”고(p. 314) 말한 것이 인상적이었다. “어른 ‘이전’에 있는 아이”도 “아이 ‘이전’에 있는 어머니도” 아닌, “어른, 아이, 어머니의 엄밀한 동시간성이며 이것들의 비교적인 밀도와 강도의 지도이며, 또한 이 지도상의 온갖 변이들”로(p. 314) 이 CsO를 규정할 때, 특히 우리에게 익숙한 다소 위계적이고 발달적인 진행 안에 있다고 흔히 여겨져 온 여러 관계들을 다시 생각해 볼 수 있을 것 같다. 학생과 교사, 자식과 부모, 어린이와 어른, 후배와 선배, 직원과 그의 상사, 예비교사와 교사 등 교육이나 사회의 어떤 관계들을 ‘이전’과 (더 발달된) ‘이후’의 관계가 아니라 동시간적인 밀도와 강도의 지도상의 변이들로 새로이 생각해 본다면? 우리는 무엇을 더 상상하고 만들어낼 수 있을까? 이것은 세상이 고른 판, 고원이 되는 것과 어떻게 연결될까?
CsO 개념을 접하면서 아이를 임신하고 출산해서 막 키우기 시작했던 시기가 떠올랐다. 초음파에서 콩알처럼 보이던 모습, 어느 날 팔과 다리가 생기고 흔들던 모습이 떠올랐다. 또, 신생아 시기를 떠올려보면 ‘주체화’와 ‘의미생성’, ‘유기체’에 구속되어 있지 않는 것 같던 때 같기도 했다. 그러나 주변 사람들, 상황들, 말들, 이미지들과 연결접속되며 지층화가 이루어지고 이 세계와 세계 내 ‘나’에 대한 인식(들뢰즈와 가타리의 표현에 따르면 ‘환상’)을 형성하는 것 같았다. 그리고 무엇보다 교육기관(어린이집, 유치원, 학교 등)이 그러한 의미생성과 주체화에 굉장히 적극적인 역할을 하고 있음을 경험했다. 학교가 자신의 아이에게 ableist/sexist/racist 메시지를 주는 모습을 지켜보며 홈스쿨링을 결정한 지도교수님의 이야기도 이와 연결된다. CsO 개념은 사회 규범을 가르치는 교육 기관의 정체성을 어떻게 흔드는가? 학교교육의 목적과 지향을 어떻게 비트는가?
p.s. 들뢰즈와 가타리는 “CsO는 유년기의 블록이고, 생성이며, 유년기의 추억과는 정반대되는 것… 그것은 어른 ‘이전’에 있는 아이가 아니며 아이 ‘이전에 있는 어머니도 아니다. CsO는 어른, 아이, 어머니의 엄밀한 동시간성”이라고 이야기한다(p. 314). 악! 이것이 도대체 무슨 말인가?
“더 이상 자아도 타자도 없게 되는 것(p. 300)”, “자아가 아닌 우리란 과연 누구일까?(p. 305), “유기체를 해체하는 것은 결코 자살하는 것이 아니며, 오히려…영토들과 측량사의 기술로 계측된 탈영토화를 향해 몸체를 여는 것이다(p. 307).” 이러한 문구들이 나로 하여금 CsO 개념에 대해 설레는 마음을 갖게 했다. 지난 번 모임에서 이야기 나눈 것처럼 협소한 젠더/능력/정상에 대한 규범과 그것이 나누는 ‘우리 vs. 그들’ ‘소수 vs. 다수’의 구분과 대립에서 벗어날 수 있는 가능성을 들뢰즈와 가타리가 말해주고 있는 듯 하다. 이들이 제안하는 것처럼 “먼저 하나의 지층에 자리잡은 다음 이것이 제공하는 기회들을 실험해보고, 거기에서 적당한 장소를 찾고, 우발적인 탈영토화의 운동들, 가능한 도주선들을 찾아내며, 그것들을 시험하면서 여기저기에서 흐름들의 접합 접속들을 확립”하고 싶은데, 무얼 어찌해야한다는 이야기인가? 지금-여기-당장 내가 있는 바로 이 시공간에서 도주선을 찾아내고 그것들을 시험해본 경험을 공유해본다면?
이들은 “너무 갑작스럽고 신중치 못한 탈지층화의 위험들”에 대해 이야기하며(p. 313), CsO를 생산해내는 것이 한없이 위험 천만한 일이고 신중해야 한다고 경고한다. 신중하지 못한 탈지층화의 위험들의 예에는 무엇이 있을까?
1_지난 번 대화에서 '(장애,퀴어) 당사자주의'가 머릿속에 맴돌았다. 예를 들면, 청각을 잃지 않고 청각을 잃은 사람을 온전히 이해하는 것 등은 어떻게 가능할까. 가능하긴 할까.
들뢰즈가 말하는 기관없는 신체에서 그 방법을 찾아보았다. 앞서 공부한 불구-되기, 퀴어-되기, 여성-되기, 흑인-되기를 위해서는 강도'0'의 상태. 즉 모든걸 내려놓고 연결을 위한 기계가 되는 상태가 되어야 하며, 그 지점이 곧 기관 없는 신체가 되는 지점이다. 이렇게 (천천히) 온전한 상태에서 연결되는 '되기'가 이루어 질때에만 나와 다른 타자들과의 완전한 공생이 이루어질 것이다.
이러한 상태는 그 누구도 도달하지 않았기에, 들뢰즈는 영원히 당신은 가질 수 없을거다 라고 말했을까. (마치 극한=0이 0에 무한히 가까워지는 것처럼) .
그렇다면 우리는 기관없는신체에 가까이 가기 위해서 어떤 노력을 해야할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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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_기관없는 몸체는 유기체,기표작용,주체화와 반대되는 개념. Cso를 만들기 위해서는 신중하게 다른 지층들을 흉내내야 한다. 즉, 한번에 유기체, 기표작용, 주체를 해체하려 하지말고 축소하고, 범위를 좁혀나가고, 청소하며 때를 잘 골라야 한다. 그리하여 텅빈, 혹은 암적인 cso가 아니라 충만한 cso가 되어야 한다.
세상에 충반한 cso보다는 텅빈, 암적인 cso가 더 많을것 같은데.. 어떤 것들을 텅빈 cso 혹은 암적인 cso라 부를 수 있을까.
질문인 듯 질문 아닌, 질문 같은 넋두리로 첫번째 질문을 대신합니다. 이 장은 영토화되어 도전과 모색, 실험과 상상을 멈춘 유기체에서 기관 없는 몸체(CsO)로 탈주하려는 실천을 멈추지 말아야 한다는 주장을 담고 있는 듯하다. 여전히 낯선 개념들을 그 배경이 되는 문화예술적, 역사적, 정치사회적, 수리과학적 맥락들을 아울러 전략적으로 배치함으로써 '글을 통한 전쟁기계'로서의 면모를 여실히 보여주고 있는 저자들에 경의를 표할 수밖에 없지만, 동시에 이것을 어떻게 내 것 혹은 우리 것으로 전유하여 어떤 '기계'로 활용할 수 있는지, 그렇게 해야만 영토화·유기체화되어 있을지도 모르는 들뢰즈·가타리에서 기관 없는 몸체로 탈주하는 것이겠지만, 그것이 어떻게 가능한 것인지 그저 모호하기만 하다.
"유기체는 매일 새벽마다 혁신될 수 있도록 충분히 보호되어야만 한다'(308쪽). 유기체(전체 혹은 일자)를 위한 부분으로 복무함으로써 새로운 삶을 향할 수 있는 잠재성과 욕망을 망각하고 습관적 성향을 반복하는 데 그치고 있는 기관을 혹독하게 비판해왔던 들뢰즈·가타리가 갑작스럽게 '유기체 보호의 필요성'을 언급하고 있다. 유기체와 더불어 '우리를 가장 직접적으로 구속하고 있는' 지층들로 명명한 의미생성과 주체성도(306쪽) '충분히' 보호해야 하며, 지층들을 흉내내어야 한다고 주장한다(308쪽). 조잡하게 지층을 파괴하는 것으로서는 기관 없는 몸체나 고른판에 도달할 수 없기 때문이라는 것이다(308쪽) . 이와 같은 들뢰즈·가타리의 주장은 '어설픈 혁신' 혹은 '낭만적 혁신', '즉자적 쾌락을 위한 배치의 변화'를 경계한 것으로 읽힌다. 내재적 욕망이 발현되지 못하도록 하는 세 가지 구속들(296쪽)의 존재, '암적인 CsO'(313쪽)의 발현 가능성을 경고하면서 이들로부터 벗어날 때 요구되는 기예가 '신중함'(307쪽)이라는 들뢰즈·가타리의 언급은 아마도 이와 같은 맥락에서 이해할 수 있을 것 같다. 이와 같은 경고(?)가 탈영토화를 위한 탈주를 꿈꾸는 우리들에게 주는 함의는 무엇일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