Deleuze&Guattari(1980/2001) 천개의고원의 1장 서론: 리좀 (pp. 11-55)을 읽고
12월 8일까지 글에 대한 질문 2-3개를 이 글에 대한 댓글로 올려주세요.
질문은 어떤 질문이든 괜찮습니다.
남들에게 멋져보이는 질문 말고, 진짜 내가 궁금한 질문, 다른 사람들과 함께 이야기 나눠보고 싶은 질문을 올려주세요.
이게 도대체 무슨 말인가요 하는 질문도 또 자신의 관심분야와 접속시켜 좀 더 멀리까지 연결 해 본 질문도 좋습니다.
부끄러운 마음으로 쓴 이상하고 솔직한 모든 질문들을 환영합니다~!!
질문을 올릴 때에는 글의 어떤 부분에서 생긴 질문인지 알 수 있도록 그 맥락을 질문에 포함해 주세요.
가령, 몇 페이지 어디에서 저자들이 뭐라뭐라고 하던데~ 하는 식으로 그 질문이 나온 맥락을 간단히 정리한 다음 자신의 질문을 적어주시면 이야기 나눌 때 더 좋을 것 같습니다~
올려주신 질문들은 익명으로 모아서 모임 당일 대화에서 활용할 예정입니다.
읽기자료 게시판에 PDF파일도 올려두었으니 책이 없으신 분들은 참고해 주세요~
(PDF파일은 빼꼼이 빠르게 스캔해주셨어요. 감사해요!!😊)
33쪽 프로이트 교수가 아이에게 끼어들어 변용태(=감정)들이 주체화 되도록, 기표가 권력을 장악하도록 하는 방식을 보여주어야 한다. 교육현장에서 감정이 주체화 된 것에 대한 경험은?
지도는 무의식을 생성한다 (30쪽) 문제는 무의식을 생산하는 일이며, 그와 더불어 새로운 언표, 다른 욕망을 생산하는 일이다. 리좀은 이러한 무의식의 생산 그 자체이다. 우리의 교육적 경험은 다소 획일화 되는 것을 추구하게 된다. 제약된 조건에서 다양성과 자신의 정체성을 찾아나가는 무의식을 생성해나간 경험은?(41쪽)
46p
어떤것을 정확하게 그려내기 위해서는 비정확한 표현들이 반드시 필요하다
필히 그것을 거쳐야만 하기 때문도 아니고 근사치를 통해서만 진행할 수 있기 때문도 아니다.
비정확함은 결코 하나의 근사치가 아니다. 반대로 그것은 일어나는 일이 지나가는 정확한 통로이다.
우리가 어떤 이원론을 원용한다면 , 그것은 다른 이원론을 거부하기 위해서일 뿐이다.
우리가 모델들의 이원론을 사용한다면, 그것은 모든 모델을 거부하는 과정에 도달하기 위해서일 뿐이다. 우리가 결코 만들려고하지는 않았지만 거쳐가게 되는 저 이원론들을 해체하는 두뇌라는 교정자가 매번 필요하다. 모든 이원론을 통과함으로써 우리모두가 추구하던 (다원론=일원론) 이라는 마법적인 공식에 도달해야 한다. 우리의 적인, 그러나 반드시 필요한 적인, 우리가 끊임없이 옮겨놓는 가구인 이원론을 통과함으로써.
ㅡ저는 이부분이 좋아요 왜일까요 다른분들도 그렇다면 좀 나누고싶어요
47
리좀은 일종의 반 계보이다 . 그것은 짧은 기억 또는 반기억 이다
36,37
짧은 기억은 리좀의 유형 , 도표 유형인데 반해 긴 기억은 나무유형이며 중심화 되어있다.
짧은 관념의 찬란함이여.
우리가 비록 긴 개념들로 이루어진 긴 기억을 가지고서 읽고 또다시 읽는다고 해도 글을 쓸때는 짧은 기억을 가지고서, 따라서짧은 관념들을 가지고서 쓴다 .
짧은 기억은 망각을 과정으로서 포함하고 있다.
짧은 기억은 순간과 뒤섞이는 것이 아니라 집단적이고 시간적이고 신경적인 리좀과 뒤섞인다.
ㅡ길고 지속되어야 하는 것들에 습관적으로 안도감 안정감을
느끼면서도 그것을 잃고싶은 마음이 내 안에서 부딪힌다.
망각의 과정은 무엇일까
50
말하자면 나에게 닥친 모든 것은 뿌리로부터 오는 것이 아니라 먼저 그 중간의 어떤 지점에서 온다. 그렇다면 그것들을 붙잡도록애써라 , 그리고 먼저 줄기의 중간에서 자라기 시작한 풀을 붙잡아 거기에 붙어 몸을 지탱하도록 애써라.
그것이 왜 그토록 어려운가? 그것은 이미 지각적 기호계의 물음 중의 하나였다. 위에서 아래로 또는 아래에서 위로 지각하거나왼쪽에서 오른쪽으로 또는 오른쪽에서 왼쪽으로 지각할 때는 그렇지 않은데, 사물들을 중간에서 지각하는 것은 쉽지 않다. 실험해 보라, 그러면 모든것이 변한다는 것을 알게 될 것이다. 사물들이나 말들 속에서 풀을 보기란 쉽지 않다 .
(니체 - 아포리즘은 반추 되어야 하며, 고원은 거기에 서식하는 하늘의 구름과도 같은 암소들과 분리될 수 없다 .)
31
우리는 멜라니 클라인의 오류를 잘 알고 있다. 클라인은 자신의 어린 환자들 중 하나인 꼬마 리처드가 만들었던 지도의 문제를이해하지 못하고 이미 만들어진 사본들, 즉 오이디푸스, 좋은아빠와 나쁜 아빠, 나쁜 엄마와 좋은 엄마를 끄집어내는데 만족했다.’
반면에 아이는 정신분석이 전혀 알지 못하는 그 무엇을 수행하려고 필사적으로 노력한다.
충동들과 부분 대상들은 발생축 위의 단계들도 아니고 심층구조 속의 위치들도 아니다. 충동들과 부분 대상들은 입구들과 출구들, 막다른 골목들 등 문제들에 대한 정치적 선택지이다. 아이는 정치적으로 , 즉 자기 욕망의 온 힘을 다해 이것들을 살아가는것이다.
ㅡ일상적으로도 직업적으로도
사람 혹은 사건 혹은 관계를 이해하기 위한 생각들을 주로 많이 하고 살게 되는데 이 부분들을 읽으며 내가 생각하는 습관에 대한 것들을 떠올리게 된다. 그것은 대부분 분석하는일인것 같다. 다른분들은 어떠신지 나눠보고싶다
처음 읽을 때 도대체 무슨 소린지 하는 생각을 했는데 나중에 멍한 상태로 그냥 쭉 읽었더니 더 많은 것들이 보이는 경험 : 첫 번째로 읽을 땐 나도 모르게 글에서 어떤 것을 찾아내고 자 했던 것 같다. "기의든 기표든 책이 말하고자 하는 바를 묻지 말아야 하며, 책 속에서 이해해야 할 그 어떤 것도 찾지 말아야 한다"(13쪽) 라는 말처럼. 나중에 멍한 상태로 읽을 땐 자연스럽게 글이 무엇과 더불어 기능하는지, 연결되어있는지 등을 느꼈던 것이어서 그랬던 것일까? 여러분의 생각은?
리좀의 특징으로 원리 1 : 연결접속의 원리, 원리2 : 다질성의 원리, 원리3 : 다양체의 원리, 원리4 : 탈기표작용적인 단절의 원리, 원리5 : 지도제작, 원리6 : 전사의 원리로 나와있는데 이 중 가장 이해하기 어려웠던 부분은 어디였을까? 모두 비슷한 부분에서 어려움을 겪었을지 궁금하다.
수목형에 대한 도주선의 추구는 절대 권력에 대한 이탈을 의미하는 것일까? 아니면 세상이 하나의 원리로 이해되고 그것으로부터 서열화 되어가는 것에 대한 이탈을 의미하는 것일까? 들뢰즈는 기존의 철학이 가진 고유하고 절대적인 개념(?)들이 가진 폐해로 그것들과 많이 닮아있는 것은 좋은 것, 많이 닮지 못한 것은 좋은 것에서 멀어지는 것으로 보았다는 글을 어디선가 본 기억이 있다. 그렇기에 들뢰즈는 절대적인 것이 상정되어 있는 상태로는 이것을 벗어날 수 없고 절대적인 것을 부정하고 모두가 다름을 인정하는 것을 이야기하는 사람이 아닐까 생각했는데 이번 글을 읽으면서도 그런 이미지가 떠오르는 것 같아서... 혹시 다른 분들도 이런 이야기를 들어보신 경험이 있으신지 궁금...
산업화 시대의 집단적 생산성 위주의 구조에서 다양화와 개별화가 필요하고 중요해진 시대에 들뢰즈의 이야기는 더 큰 의미를 보여주는 것 같다. 학교의 문화도 이런 사회적 모습과 다르지 않기에 교사로 살아가며 그동안의 학교 모습과 비교하며 읽게 되었다. 들뢰즈의 리좀형이 적용되기 가장 적합한 교육과정 구성요소는 무엇일까? 2022개정교육과정의 '학교자율시간'은 들뢰즈의 리좀형의 모습을 가져온 것은 아닐까? 여러분의 생각은?
1. 개인적으로 좀 느린 편이라 평소 ‘속도’에 대해 생각들을 종종 해보는데 글을 읽다보니 ‘속도’에 대한 표현이 여러 군데 보였다.
“중간은 사물들이 속도를 내는 장소이다. 사물들 사이는…출발점도 끝도 없는 시냇물이며, 양 쪽 둑을 갉아내고 중간에서 속도를 낸다” (p. 55). / “선을 만들되 절대로 점을 만들지 말아라! 속도가 점을 선으로 변형시킬 것이다! 54 빨리빨리, 비록 제자리에서라도! (Be quick, even when standing still!)” (p. 54) /. “연주에 가속을 붙일 때…음악상의 점들을 선들로 변형시키고 악곡 전체를 증식시키는 것이다” (p. 21). / “책의 이상은 이러한 외부성의 판 위에…모든 것을 펼쳐놓는 일일 것이다. 클라이스트는 이런 유형의 글쓰기, 즉 변용태들의 부서진 사슬을 발명했는데, 그것은 항상 바깥과 관계되어 있으며 침전이나 변형 같은 다양한 속도들을 갖고 있다” (p. 23).
혹시 속도와 관련된 부분에 나처럼 주의를 기울여 읽으신 분들이 또 있을까? 있다면 읽으며 어떤 생각들을 하였을까? 들뢰즈가타리가 자신들의 이야기를 하며 ‘속도’와 같은 감각에 주의를 기울인 이유는 뭘까? ‘속도’란건 무엇을 더 생각하게 해주는가?
2. 위의 속도 질문과 연결해서.. 속도에 대한 이야기에 이어 나오는 이야기 중 하나가 ‘측정단위’에 대한 내용이어서 측정단위로서의 속도라는 것에 대해 생각해 보게 되었다. 연주에 가속을 붙이는 이야기에 이어 들뢰즈가타리는…
“수는 어떤 원소들이 특정한 차원 안에서 차지하고 있는 자리에 따라 원소들을 측정하는 보편적 개념이기를 멈추고, 해당되는 그 차원들에 따라 변하는 하나의 다양체가 되었다…우리에게 측정 단위들은 없다. 다만 측정의 다양체들 또는 측정의 변이체들만 있을 뿐이다. 통일성(=단위)이라는 개념이 나타나는 것은 하나의 다양체 안에서 기표가 권력을 장악하거나 아니면 그에 상응하는 주체화 과정이 생겨날 때뿐이다” (p. 22)
이렇게 말하고 있는데, 우리가 평소 생각하는 객관적이고 절대적인 측정단위와는 다른 개념이라고 생각이 되었다. 들뢰즈가타리가 말하는 ‘속도’라는것도 우리가 아는 측정 단위가 아니라 측정의 다양체들 측정의 변이체들이라 할 수 있다면, 기존의 속도 의미와 다른 다양체/변이체로서의 속도라는 것은 어떤 것일까? 어떻게 감각될까? 속도를 다양체/변이체로 생각하면 무엇을 더 생각해 볼 수 있게 될까? 속도 뿐 아니라 다른 측정단위들도 만일 이렇게 생각해 본다면 우리는 그 측정단위를 가지고 우리는 무엇을 더 감각/상상해 볼 수 있을까?
3. “언제나 사본을 지도로 바꿔 놓아야 한다” (p. 32) “는 이야기에 깊이 공감이 되었다. 또 사본과 지도가 서로 반대가 아니고 (p. 34) 나무와 리좀이 반대가 아님을 (p. 46) 생각하니, 사본을 지도로 바꾸는 일을 지금 여기에서 시작해 볼 수 있다는 희망을 느꼈다. (둘이 이분법적이지 않은 만큼 물론 그 반대(지도->사본) 방향으로 가버리는 것도 경계해야 하겠지만.) 그렇다면 이런 ‘사본을 지도로 바꾸기’는 어떻게 할 수 있을까? 지도의 특징중 하나가 “언제나 많은 입구를 가지고 있다”는 것이라고 했는데( p. 30) 어떤 입구들을 만들/열 수 있을까? 지난 번 모임에서 ‘탈주-지도그리기’ 이야기를 할 때, 우리의 이야기가 인간너머 다양한 존재들과의 얽힘을 잊은 ‘인간주체로서의 나의 탈주’ 이야기가 되어버린 부분이 있었는데, 어쩌면 이것도 한 때 지도였던 것이 사본이 된 것이라 할 수 있을까? 그를 다시 지도로 바꿔놓으려면 어떻게 할 수 있을까? 어떤 입구들을 만들어 다시 지도로 열어내 볼 수 있을까? 다른 경우는? 각자의 맥락에서 사본을 지도로 바꾸기는 어떤 모습일까?
4. “서로 아무런 관계도 없는 두 존재의 비평행적 진화”를 (p. 25) 교육에 연결시켜 생각해 볼 수 있을까? 교사와 학생을 당연히 서로의 필요를 위해 존재하는, 한쪽이 한쪽을 모방하는 '평행적 존재’들로 보지 않고 (혹은 이런 존재들로 보는 동시에) 상호관련 없는 이질적인 존재들의 탈/재영토화를 통한 생성/진화로 본다면? ‘교사의 학생-되기’와 ‘학생의 교사-되기’를 둘 “공통의 리좀으로 이루어진 도주선” 그리고 “그것을 향한 두 이질적인 계열의 폭발”로 이루어진 관계로 생각해 본다면? 교육에 대해 무엇을 더 상상하게 되나? 교육 외에도 이런 관계들이 있다면? 모방하는 관계일거라 생각했던 관계가 실은 “서로 이질적인 한에서 리좀을 형성”하는 관계라면?
1. 문자 표기법, 데생, 사진과는 달리, 또한 사본과도 달리 리좀은 생산되고 구성되어야 하며, 항상 분해 될 수 있고 연결접속될 수 있고 역전될 수 있고 수정될 수 있는 지도와 관련되어 있으며, 다양한 출입구들과 관련되어 있으며, 나름의 도주선들을 갖고 있다. 지도로 바꾸어야 하는 것은 사본이지, 역으로 지도를 사본으로 바꾸어야 하는 게 아니다. 그렇다면 각자 사본이라고 생각하는 것은 무엇인지 알고 싶다. 그 사본을 지도로 바꾸어 본 경험이나 바꾸고 싶은 것은 어떤 것이 있을 지 이야기 해보고 싶다. > 48p 첫번째 단락
2. 뿌리 말고 리좀을 만들어라. 절대로 심지 말아라. 씨 뿌리지 말고 꺽어 꽂아라. 하나도 여럿도 되지 말아라. 다양체가 되어라. 선을 만들되 절대로 점을 만들지 말아라…… 당신들 안에 있는 장군을 깨우지 마라. 올바른 관념들이 아니라, 단지 하나의 관념을, 짧은 관념들을 가져라. 사진이나 그림이 아니라 지도를 만들어라. 핑크팬더가 되라 (54p) > 내 안에 있는 장군은 무엇일까? 나는 어떤 핑크팬더가 되고 싶은가?
3. 중간은 결코 하나의 평균치가 아니다. 반대로 중간은 사물들이 속도를 내는 장소이다. (55p) 그것은 출발점도 끝도 없는 시냇물이며, 양 쪽 둑을 갉아내고 중간에서 속도를 낸다. > 혹시 이 문장과 관련하여 생각나는 사례가 있는 지 함께 이야기 나누어 보면 좋겠다.
1. "탈영토화의 여러 운동과 재영토화의 여러 과정은 끊임없이 가지를 뻗고 또 서로를 받아들이고 있다… 서양란은 말벌의 이미지를 만들고 말벌을 본뜨면서 탈영토화되지만, 말벌은 이 이미지 위에서 재영토화된다. 한편 말별은 서양란의 생식 장치의 한 부분이 됨으로써 탈영토화되기도 하지만, 서양란에 꽃가루를 옮김으로써 서양란을 재영토화한다. 말벌과 서양란은 서로 이질적인 한에서 리좀을 형성한다….서로 아무런 관계도 없는 두 존재의 비평행적 진화.” (p. 25)
이 문장이 흥미롭다. 휴머니스트의 딸인 나는 탈영토화를 ‘저항을 통한 해방’, 재영토화를 ‘권력으로의 (재)포섭’ 정도로 생각하려는 경향을 떨칠 수가 없다. 이 문장을 감각해보고 싶고, 이 문장과 연결접속하여 나만의 탈주선을 만들어보고 싶다! 이 문장을 감각해보기 위해 제안한다. 각 항에 무언가를 넣어서 ‘탈영토화-재영토화의 이야기’를 주렁주렁 달아보자! 만일, Butler가 주목한 드래그퀸의 이야기를 생각해보면…드래그 퀸(drag queen)의 과장된 여성성은 우리가 당연하게 생각했던 것이 일종의 퍼포먼스임을 보여준다. 드래그 퀸은 그 존재 자체만으로도 자연화된, 그래서 그 동안 의문시하지 않았던 남성과 여성의 이분화된 젠더 범주에 대해 문제제기하도록 촉진한다. 드래그 퀸의 퀴어적 몸은 여성의 이미지를 만들고 여성의 몸을 본뜨면서 탈영토화되지만, 여성성은 그 퍼포먼스로 재영토화된다. 한편, 여성성은 그것이 그저 퍼포먼스의 하나로 감환되면서 탈영토화되지만, 드래그퀸은….??? 어렵다!
2. “지도가 언어수행(performance)의 문제인 반면, 사본은 항상 이른바 ‘언어능력(competence)’을 참조한다” (p. 30) “분명 프로이트는 꼬마 한스가 지도를 만들고 있다는 것을 고려하고 있었지만, 단지 그것을 가족사진에 맞춰 넣으려고 그랬던 것” (p. 33)
이 두 문장은 얼마 전에 물고기(우리별칭)와 나누었던 ‘역량’을 강조하는 요즘 교육 담론에 대해 생각하게 한다. 학생이 지도를 만들고 있었고 교사-연구자도 이를 고려하고는 있었지만, 단지 그(녀)의 수행을 역량의 틀에 맞춰넣으려고 그랬던 것은 아닌지? 이러한 교육 맥락에서 사본이 아니라 지도를 그린다는 것은? 사본이 아니라 지도를 그리려는 것은 일상적 실천을 어떻게 바꿀 수 있을지?
3. “n에서, n-1에서 써라! 슬로건을 통해 써라. “뿌리 말고 리좀을 만들어라!” “절대로 심지 말아라!” “씨 뿌리지 말고, 꺾어 꽂아라!” 하나도 여럿도 되지 말아라, 다양체가 되어라! 선을 만들되 절대로 점을 만들지 말아라! 속도가 점을 선으로 변형시킬 것이다! 당신들 안에 있는 ‘장군’을 깨우지 마라!…사진이나 그림이 아니라 지도를 만들어라! 핑크 팬더가 되어라!” (pp. 53-54)
탈주-지도제작단은 “성장주의, 신자유주의, 능력주의가 상상력의 범위를 좁히고 여러 가지 형태의 소외와 배제, 차별과 착취를 낳는 고향을 낯설게 보고 그로부터 탈주”하고자 만들어졌다. 나-우리가 상상하고 감행하는 탈주, 그것을 향한 슬로건을 써보자! 먼저 시작해보면… 복사하지 말고, 번역하고 변주해라! 네 안에 있는 타자를 깨워라! 관망하지 말고 연결접속해라! 개미떼처럼 움직여라! 그것을 이해하려고 하지 말고 그것과 춤을 추어라!
들뢰즈와 가타리의 글을 읽으며 "도대체 무슨 소리를 하는거야?" 라는 생각, 저만 한걸까요?
38쪽, "위계적 구조의 우위를 인정하면 결국 나무 형태의 구조가 특권을 갖게 된다....즉 자신의 상급자만을 인정한다...나무조직은 개체에 선생하며 개체는 나무 조직안의 특정한 자리에 통합된다." - 내 삶과 일의 공간에서 이와 가은 나무형태의 구조와 나무조직의 모습이 겹쳐 보였던 적은 없나요? 있다면 어떤 상황이었나요?
41쪽 전반에 흐르는 저자들의 동-서양 혹은 유럽과 중국을 나누는 다소 이분법적 기술을 읽으며 "서양"의 학자들이 바라보는 "동양"의 모습에 불편한 부분은 없었나요? 있었다면 그 이유는?
탈영토화의 궁극의 목표(이런 말을 쓰는 것 자체가 모순인 것 같지만)는 재영토화인가? 아니면 탈영토화 그 자체인가? 탈영토화는 천지만물의 속성으로서, 국가장치의 개입이 없다면 저절로 이루어지는 것인가? 아니면 국가장치의 개입이 없더라도 끊임없는 각성과 실천을 통해서 이루어내야 하는 것인가?
'하나의 다양체는 ~ 자신의 지층들을 갖고 있는 것은 아닐까? 도주선마저도 ~ 결국 스스로가 그런 대형들을 재생산하게 되는 것은 아닐까? 하지만 그 역 또한 참이며, 따라서 문제는 방법이다'(31~32쪽). 이 부분은 탈영토화에 대한 지향과 실천이 결국은 (재)영토화로 귀결될 수 있음을, 또 다른 형태의 수목 혹은 권력으로 귀결될 수 있음을 인정(경고)하는 것으로 읽힌다. 그렇게 되지 않을 방법이라는 게 있을까? '방법'에 주목하기보다 (재)영토화의 '목적'에 주목해야 하는 것은 아닐까?
'뿌리-나무와 수로-리좀이 대립되는 두 모델이 아니라는 점이다'(46쪽), '모든 이원론을 통과함으로써 우리 모두가 추구하던 다원론=일원론이라는 마법적인 공식에 도달해야 한다'(46쪽). 이는 뿌리-나무 모델이 수로-리좀 모델의 외부로 작용하면서 다원론=일원론에 이르도록 하는 '가치'를 갖는다는 말인가?
조직과 조직 구성원 의 관계에 비평행적 진화(25쪽)라는 개념을 적용할 수 있는가? 특정 구성원의 비평행적 진화는 비평행적 진화하기를 포기한 다른 구성원의 헌신이나 희생 혹은 묵인을 바탕으로 한 것은 아닌가?
1.(전체적인 내용 관련)
수목형과 리좀형의 대비. 그리고 우리는 끊임없이 수목형을 리좀형으로 바꾸어야 한다고 하는 작가의 말.
우리 교실은 기본 형태가 수목형이라고 생각한다. 혹은 수목형 이어야 한다고 생각한다.(정해진 교실 공간. 국가 교육과정의 존재. 아이들이 30명 교사가 1명인 교실에서 31명의 다수결로 진도를 나갈 수는 없는 일.). 그러나 이런 수목형인 교실을 계속적인 리좀형으로 바꾸는 것이 교사의 책무가 아닐까? 즉, 내가 추구하는 교실의 모습은 ‘리좀형’으로 태어난 교실 보다는 수목형에 뿌리를 두되 ‘리좀형 되기’를 실현하는 교실이어야 하지 않을까?
2.43쪽 4줄
“잡초는 일구지 않은 황폐한 공간에 있으며 그곳을 채울 뿐이다. 그것은 사이에서, 다른 것들 가운데서 자란다” 내가 나무만 좇으며 삶에서 놓치고 있었던 잡초와 같은 리좀은 무엇이었을까. 때로는 하찮다고 무심코 여겄던 모든 것에 관심을 가지게 되는 것. 귀하다고 생각했던 것에서 천하다고 생각했던 것으로 시선을 이동하는 것. 이것이 나에게 필요한 자세가 아닐지..
3.48쪽 2문단
“고원” : 자기 자신 위에서 진동하고, 정점이나 외부 목적을 향하지 않으면서 자신을 전개하는, 강렬함 등이 연속되는 지역.
나의 고원은 무엇일까. 내가 생각하는 나의 고원은 오롯이 나를 위해 투자하는 습관이나 자원 등을 이야기 하는 것 같다. 꾸준히 하고 있는 운동이나 요즘 시작한 새벽 글쓰기, 고전 30권 읽기 등이 아닐까 싶은데.. 여기 계신 분들의 고원이 궁금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