Kwan & Scheinert (2022) 감독의 영화 Everything Everywhere All at Once (에브리씽 에브리웨어 올 앳 원스)를 보고 3월 8일까지 영화에 대한 질문 2-3개를 이 글에 대한 댓글로 올려주세요.
언제나 그렇듯, 영화에 대한 이상하고 솔직한 모든 질문들을 환영합니다~!
이번 역시, 영화의 어떤 부분과 연결하여 생긴 질문인지 알 수 있도록 그 맥락을 질문에 포함해 주세요.
올려주신 질문들은 익명으로 모아서 모임 당일 대화에서 활용할 예정입니다 :-)
1. 알파유니버스 사람들은 영웅을 찾아 혼란을 멈추고 세상을 원래 모습(?)으로 돌리고자 한다. 이분법적으로 카오스는 악이고 자신들은 질서를 지키는 정의의 존재라 여긴다. 그렇게 만들기 위한 당위성으로 누군가의 희생을 당연시 한다. 세상을 비판하고 정의를 외치면서도 결국 사회적 약자를 또 희생시키는 우리들의 모습 같다. 알파유니버스의 논리에 익숙한 우리는 어떻게 이분법을 넘어선 결말부분에서의 에블린이 될까? 아니면 에블린에게서 희망을 본 죽어가는 알파웨이몬드라도 될 수 있을까? 알파유니버스에서 온 우리는 어떻게 모든 곳에 있고 무엇이든 될 수 있는 그러나 완벽하지 않은 누군가와 완벽하지 않은 지금/여기에 함께 있기로 하는 그런 몸체로 탈주할 수 있을까? 그 때 질서와 카오스, 유기체와 기관없는 몸체와의 관계는 뭘까?
2. 알파 유니버스에서는 누군가 개발한 대단한 시스템을 토대로 모두가 가면 좋을 곳과 그곳에 다다르는 주문을 미리 부여 받아 점프를 실행한다. 그렇지만 에블린은 자신의 행동이 어떤 결과를 가져올지 또 어디로 자신을 점프 시킬지도 모르고 점프한다. 둘의 차이는 뭘까? 어떻게 후자의 선택이 나오는걸까? 어떤 때에 이런 위험부담을 기꺼이 감수할 수 있는걸까? 어떤 이유로든 원래 이런 시도를 잘 안 하는 사람이 있다면 어떻게 하면 좀 더 과감하게 이런 시도를 해볼 수 있게 될까?
3. 영화는 퀴어하고 불구이고 순진/친절한(?) 사람들(조이와 베키, 소세지 손가락 사람들, 웨이몬드)을 종종 부족한 존재로 여기는 오늘날 사회의 시선이 어떻게 대안적으로 달라질 수 있는지 조금씩 옮겨가며 보여준다. 영화에서처럼 현실에서도 이렇게 세상이/서로가 새로이 감각될 수 있게되려면, 우리는 무엇을 할 수 있을까? 자신, 타인 혹은 인간너머 존재들과 함께 어떤 접속과 점프와 인정과 저항과 싸움을 감행해야 할까?
1.한 토요일에는 기관 없는 몸체나 장애를 가진 몸에 대해 생각하며 머리를 싸매고, 다른 토요일에는 부동산 시세지도 그리기 특강을 들으며 뭔지 몰라도 뒤처지지 않으려 애쓰는 모순을 담고 있는 내 머리가 everything bagel 이다.
예전에는 내가 아는 옳고 그른 것, 착하고 나쁜 것이 명확했고, 그게 절대적이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세상에서 나만 똑똑하고 착한 것도 아니란 것, 나랑 반대의 의견이 헛소리가 아니란 걸 깨달으며 그럼 무얼 중심에 두고 사는게 맞는 것일지 헤매게 되었다. 좋음과 나쁨은 능동적이고 일시적인 선별의 소산일 뿐이며, 이 선별은 항상 갱신되어야 한다는데.(천개의 고원 어딘가에서..) 그럼 지금은 맞고 그때는 틀리고, 여기선 맞는데 저기선 틀린가? 직장생활 가족 운동 식사 공부 가계부쓰기 투자공부 환경보호 하나도 빠짐없이 다 제일 중요하다는데 그럼 뭐 어떻게 살아야 하나? 그냥 내맘대로 막 살아도 되나? 까지 의식이 흘러간 경험이 몇 번 있다. 영화를 보며 그런 경험들이 생각나 나도 자칫하면 조부 투바키가 되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인류는 희망이 없으니 이대로 두면 금방 멸종될 것이고 지구를 리셋시켜야 한다고 한창 말하고 다니던 때도 있었는데, 유기체가 없는 멀티버스에서 에블린과 조이가 돌로 존재하는 장면을 보면서는 그 때가 떠올라서 재미있었다. 영화 초반부 종종대며 많은 일들을 잘 해내려 노력하지만 세상 느긋한 남편을 보며 스트레스 받는 에블린의 모습에서도 내 모습이 보였다. 다른 분들도 등장인물이나 장면 속에서 자신의 모습을 발견하셨을지 궁금해요.
2. 영화는 “be kind" 라는 단순하고 다정한 방향을 제시해 준다.(고 나는 이해했다) 나도 동의하고, 보통 그렇게 살아가려 노력한다. 근데 진짜진짜 진짜 이걸로 될까? 툭하면 소송이 오가는 이 세상에서.... 다정함으로 무장하면 적어도 갈등과 싸움의 당사자가 되는일은 운 좋으면 면할 수도 있겠다. 하지만 이미 진흙탕싸움에 빠져든 사람들을 어거지로 중재해야 하는 상황에서도 친절함이 먹힐까? 그럴 땐 친절함 다정함도 노동이 아닐까?
Verse jump는 장면이 갈라지고 부서지고 혼란스러우면서 이루어 지는데 ’불구의 시간‘이 떠올랐습니다. 어딘가 뒤틀리고 어긋난 시간들을 경험할 때 우리는 어쩌면 또 다른 크고 작은-어쩌면 시시할지 몰라도-가능성들을 경험하는건 아닐까 생각했습니다.
영화 초반 조부투바키와 에블린이 만났을때, nothing matters라면 아무것도 이루지 못한 괴로움과 죄책감이 사라진다고 했던 장면과 커다란 베이글 앞에서 조이가 에블린을 죽이려고 한게 아니라 내가 보는걸 보고 내가 느끼는걸 느끼는 사람을 찾았고 그게 당신이라고 했던 장면들. 조이가 모든것을 파괴하려던게 아니라 스스로를 파괴하려한 것이고, 탈출하고 죽는것이라고, 하지만 혼자가지 않으려고 한것, 조이와 에블린이 여러 세계에서 끊임없이 상처주고 갈등하는데, 영화에선 뗄레야 뗄 수 없고 무한히 미워하면서도 사랑할 수 밖에 없는 부모와 자녀 관계로 표현했지만 모든 것이 한 사람 안에서 일어나는 갈등으로도 보였습니다. 스스로에 대한 일정 정도의 파괴 본능과 정 반대의 자기애는 늘 공존하는 것 같았고요. 다른 분들은 어떠셨는지도 궁금해요.
매우 흥미로운 영화였다. 처음 시작부터 영화가 끝날 때까지 무심한 듯 다양한 상징들이 있어서 반복해서 보게 되는 매력이 있다.
조이가 만든 검은 베이글과 에블린이 나중에 이마에 붙이게 되는 인형 눈알은 서로 같은 형태를 취하는 듯 하면서도 대척점에 있는 것 같다. 모든 걸 경험하고 결국 죽음이라는 필연성으로 허무주의를 대표하는 베이글과 제 3의 눈 또는 지혜의 눈과 같은 인형 눈…… 우리는 어떻게 해야 그러한 지혜를 가지고 싸우는 듯 싸우지 않는 듯 그렇게 세상을 살아갈 수 있을까? 나중에 아버지가 시켜서 점퍼들이 총을 쏘게 되는데 에블린 이마에 있던 총알은 아버지가 내밷는 독설같다. 그 독설이 어느 순간 더 이상 에블린에게 상처를 주지 않고 제 3의 눈으로 변화하게 되는데 그 지점이 매우 흥미롭다. 우리도 살면서 부모로부터 또는 사회에서 만나는 사람들로 부터 상처를 받게 되는데 그것이 어떻게 제 3의 눈으로 변화할 수 있는가? 마치 고원이 되는 과정 같기도 하고 기관없는 몸체가 되는 과정 같기도 하다.
에블린이 중간 이후 에블린의 아버지가 내겐 너같은 딸이 없다고 했을 때 에블린이 ‘상관없다. 마침내 나 자신을 사랑하게 되었다?‘라고 하는데 그렇게 자존감을 회복하는 것은 무수한 우주에서 다양한 가능성의 에블린을 만났기 때문일까? 마침내 부모가 아니더라도 나 자신의 자존감을 회복하기 위해서는 무엇이 필요한가. 이 과정이 에블린이 마침내 딸의 여자친구를 진심으로 받아들이는 과정과 맞닿아 있는 것 같기도 하다.
1.내가 영화에 대해 정의한 한 문장. 괴랄하고, 발칙하며, 쾌감을 주며, 동시에 눈물도 주는 영화! 그 중 인상 깊었던 두 부분에 대해 이야기해보고자 한다.
”verse jump"나는 평소 금기를 깨거나 발칙한 상상을 혼자 하며 낄낄댈때가 많은데, 이러한 생각을 바탕으로 이루어지는 verse jump가 마음에 들었다. 손가락질을 받는 엉뚱함, 말썽이 (트러블이) 또다른 탄생의 도약이 된다는 게 신선했다.
”에블린의 새끼손가락“ 실패가 있었기에 성공이 가능했던 다른 우주의 에블린들. 나의 실패가 누군가에겐 성공일 수 있고, 결국 모든 것은 하나로 이어져 있다는 점이 인상깊었다.(지난번 모임에서 들었던 '실패지원금' 도 계속 멤돌았다.) 실패하면 어떤가. 하나의 문이 닫히면 다른 하나의 문은 또 열리는 것을. 그런 의미에서 에블린의 새끼손가락도 나에겐 참 흥미로웠다. 다섯개의 손가락 중 가장 나약하고 작은 손가락이지만, 위기상황에 있을때 에블린을 구한 것은 그 나약함의 힘이었기 때문이다. (각자의 인상 깊었던 포인트가 궁금합니다.)
2. 영화에서의 베이글은 눈동자의 모양을 하고 있다. 주인공이 쓰는 살벌한 소품에도 ”눈“이 댕글댕글 그려져 있기도 하다. 심지어 “눈”은 에블린 이마에도 위치한다. (각자 ”눈“은 어떻게 해석 하셨는지요..?) 나는 이 영화에서 나오는 ”눈“은 우리가 세상을 바라보는 시선이라고 생각한다. 우리가 사는 이 세상은 나의 시선에 따라 싸움터가 되기도 하고, 사랑터가 되기도 한다. 우리는 전쟁통에서도 다정함을 찾을 수 있다. 언제나 바라보는 것은 나였고, 시선을 돌릴 수 있는 것도 나였다. 사랑하는 이에게 불평과 비난은 멈추고 (결국 우리 모두는 조금씩은 서툰 존재들이기에) 다른 ”눈“으로 다정함을 찾아 함께, 사랑하라는 해답을 보여주기 위한 장치는 아니었을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