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hmed, S. (2010). 행복의 약속: 불행한 자들을 위한 문화비평(성정혜, 이경란 역, 2021)의 2장 “분위기 깨는 페미니스트”와 4장 “우울증적 이주자”를 읽고 7월 5일까지 글에 대한 질문 2-3개를 이 글에 대한 댓글로 올려주세요.
(책이 없으신 분들을 위한 PDF파일을 올려두었습니다~)
질문은 어떤 질문이든 괜찮습니다. 남들에게 멋져보이는 질문 말고, 진짜 내가 궁금한 질문, 다른 사람들과 함께 이야기 나눠보고 싶은 질문을 올려주세요. 이게 도대체 무슨 말인가요 하는 질문도 또 자신의 관심분야와 접속시켜 좀 더 멀리까지 연결 해 본 질문도 좋습니다. 부끄러운 마음으로 쓴 이상하고 솔직한 모든 질문들을 환영합니다~!!
질문을 올릴 때에는 글의 어떤 부분에서 생긴 질문인지 알 수 있도록 그 맥락을 질문에 포함해 주세요.
가령, 몇 페이지 어디에서 저자들이 뭐라뭐라고 하는데~ 하는 식으로 그 질문이 나온 맥락을 간단히 정리한 다음 자신의 질문을 적어주시면 이야기 나눌 때 더 좋을 것 같습니다~
올려주신 질문들은 익명으로 모아서 모임 당일 대화에서 활용할 예정입니다.
“맞는 말이긴 한데 그렇게 생각하면 할수록 너만 힘들어(불행해져)”
내가 페미니즘을 알아가며 늘 분노하던 스무살의 동생에게, 또 ‘다문화 아이’로서 마이크어그레션을 겪었던 나 자신에게 했던 말이다.
나는 그 누구보다 행복의 약속을 굳게 믿고, 행복을 누릴 수 있는 위치에 도달하려, 행복의 조건들을 달성하여 마침내 그것을 얻어내는 것을 목표로 살았다(또는 아직도 그러고 있다). 이런 저런 상황에서 분명하게 느껴지는 뱃속의 불편함을 애써 무시하며, 아냐 이건 불편한게 아냐, 아냐 이건 그럴 수도 있는거야, 이 정도는 별 것 아니야 하면서 살았다.
최근에 나 자신에 대해 돌아보면서 이 지점을 발견하고 조금은 충격받았고, 한편으로는 내 스스로에 대해서 명확하지 않았던 부분을 좀 더 선명하게 이해하게 되었다고 생각했는데, 마침 읽게 된 이 책이 그 지점을 더 잘 설명해주는 관점을 제시해 주었다.
질문: 행복의 약속을 삶 속에서 어떻게 받아들이며 살았는지, 행복의 약속에 대해 타인에게 어떤 조언/말(저는 동생한테 그냥 무시하면 편해, 그런가보다 하면 편해 이런 말을 했었네요)을 했는지?
< 2장 분위기 깨는 페미니스트 >
페미니즘의 역사는 문제 일으키기의 역사, 다른 사람들이 좋다고 하는 것을 따르지 않거나 다른 사람들을 행복하게 만들어 주는 일을 거부함으로써 소피가 되기를 거부한 여성들의 역사이다. 112P
삶을 위해 행복을 떠난다는 것은 가능성을 알아차리는 것이다. 144P
우리는 “당신은 틀렸소. 당신은 행복하지 않소. 당신은 거짓 믿음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그렇다고 생각할 뿐이오.”라고 말하기보다는, 세상에 대한 우리의 의식에 뭔가 거짓된 것이 있소. 우리는 눈앞에서 벌어지는 일들을 보지 못하도록, 의식하지 못하도록 배워왔소. 라고 말해야 할 것이다. 행복은 말하자면 덮개를 제공한다. 세계를 조화로운 것으로 보는 관점, 세계관에 맞지 않는 것, 반대하는 것은 덮어 버리는 방법인 것이다. 개개인이 허위 의식에 시달리는 것이 아니라, 어떤 특정한 방식으로 사물을 보는 법 혹은 보지 않는 법을 배우면서 우리는 특정한 허위의식을 계승한다. 154P
우리는 우리 탓이라고 여겨져 온 불행의 원인이 우리가 아닐 뿐 아니라 그렇게 불행의 원인으로 여겨져 온 결과물도 우리가 아님을 알 수 있다.
우리가 비록 같은 곳에 몸담지 않는다 해도 행복으로부터의 소외를 인식하면서 연대할 수 있다. 심지어 분위기(즐거움)를 깨는 데는 즐거움이 있을 수 있다. 분위기를 깨는 것, 이것이 바로 우리가 해야 할 일이고 하고 있는 일이다. 160P
분위기를 깨는 사람이 되고 싶지만 용기가 나지 않았던 때도 있었고, 왠 정열이었는지 회의에서 분위기를 깨고 이야기를 하고 아이들처럼 유치하게 말싸움을 했던 기억도 있다. 다른 분들은 분위기를 깨고 싶었던 어떤 기억들이 있었는 지 이야기 나누고 싶다.
< 4장 우울증적 이주자 >
당신을 향한 폭력에 상처 받지 않을 의무, 심지어는 그 폭력을 눈치채서도 안 될 의무, 폭력이 당신을 스쳐 지나간 것처럼 그것을 지나가게 할 의무가 있는 것이다. 인종차별의 역사를 의식하고 그것에 대해 입을 열 경우, 인종차별을 의식한 경우와 마찬가지로, 정서 이방인이 된다. 정서 이방인은 이방의 정서를 가지고 뭔가를 할 수 있는 사람, 우리가 해야 하는 그런 일들을 하는 사람이다. 288P
만약 이주를 문화에서 어쩌다 발생한 일이 아니라 계속해서 펼쳐진 역사의 일부로 인식할 경우, 문화는 시간에 따라 다르게 펼쳐지는 것이 될 것이다. 만약 문화가 펼쳐져 있는 무엇이라면, 뭔가를 공유하기 위해 꼭 같은 길로 갈 필요는 없을 것이다. 우리는 함께 한다는 감각을 좀 더 느슨하게 구축할 수도 있을 것이고, 그럴 경우 행복에 대한 우리의 희망을 같은 사물에 둘 필요는 없을 것이다. 289P
느슨한 국가 소속 모델은 자유주의적 다문화주의의 용어들로 기술되기 쉬우며, 이 경우 특이한 차이들이 국가적 차원에서 허용될 것이다. 하지만 우리는 행복 대상 선택을 다양화하는 것 이상의 일을 해야 한다.
불행을 인식하기 위해서는 행복이 다양화된다 해도 정치적 기억에서 적대가 제거되지 않는다는 것을, 그리고 제거될 수 없다는 것을 탐색해야 한다. 우리는 어떤 역사들은 뒤로하는 것이 불가능함을 인식해야 한다. 이런 역사들은 끈질기게 지속된다. 그리고 우리는 그런 역사의 지속성과 함께하는 우리의 불행을 끈질기게 말해야 한다. 290P
2. 함께 한다는 감각을 느슨하게 구축한다는 것은 어떤 의미일까? 그것이 결국 우리가 그려야 할 탈주 지도와 관련이 있는 걸까? 사실 나는 어는 곳에도 속해 있지 않다. 아직은 상실감을 크게 느끼고 있지는 않지만.... 아무 곳에도 속해 있지 않다는 것이 또 다른 가능성을 이야기 하는 것일 수도 있을까? 나도 함께한다는 감각과 이방의 정서를 가지고 뭔가를 할 수 있을까?
3. 행복 대상 선택을 다양화하는 것 이상의 일을 해야 한다고 하는데 그런 일들의 예를 찾아볼 수 있을까? 분위기를 깨는 일, 불행을 끈질기게 말한다는 것이 가능할까?
이 책을 읽는 내내 참 재미있다고 느끼면서도 난감했다. 재미있다고 느낀 건 어렴풋이 그러려니 하고 생각했던 것을 아주 분명하게, 그것도 재미있게 써내려간 저자의 문제의식과 문체 때문이었고, 난감했던 건 그래서 이 글을 읽고 어떤 질문을 올려야지 하는 생각 때문이었다. 2장과 4장을 다 읽은 지금도 마찬가지 감정이다. 재미있는데 참 난감하다.
이 책은 행복은 무엇인가에 대한 답 대신 '행복'은 어떤 작용을 하는가에 대한 답으로 구성되어 있다. 정확하게 말하면 '행복'이라는 이데올로기는 어떤 것을 조건으로 만들어져서, 우리가 어떤 배경을 가지고 있건 간에 관계없이 우리 모두를 지배하고 있는지를 소설과 영화를 예로 들면서 설명하고 있다. 문득 이 책의 저자가 답하고자 했던 문제, 행복은 어떤 작용을 하고 있는가를 나에게 적용시켜 보려고 했을 때 역시 난감했다. '행복'이라는 단어는, 적어도 내 성장 과정 속에서는 실재하지 않는 것이었고, 거기에 닿기를 소망한다 해도 닿을 수 없는 것이었으며, 그 실체를 상상해보는 것조차 쉽지 않은 것이었다. 저 사람은 참 행복해서 좋겠다, 참 부럽다 이런 감정을 느껴 본 적도 그닥 많지 않은 듯하다. 이런 나는 행복 이데올로기로부터 덜 오염된 사람일까? 아니면 행복 이데올로기가 주입과 오염의 대상으로 상정조차 하지 않아도 될만큼 '하찮은' 사람일까?
이 책에서 말하는 '행복'과 들뢰즈가 말하는 '욕망'은 어떤 점에서 같고 다를까?
1. 나는 2장에 나온 “트러블 메이커”, “분위기”와 “흥을 깨는 사람”이다. 쓸데없이(?) 딴지를 거는 사람이라고 찍히고 “회의에서 입만 열어도 ‘사람들이 아 쟤 또 시작이네’라는 듯 눈을 굴리는 것” (121) 같은 느낌도 많이 경험해 봤다. 말투가 문제일까 돌려 말하는 기술이 부족한 것일까 어떻게 좋게 말해야 하는걸까 하는 것은 특히 대학시절부터 시작된 나의 오랜 고민이다. 책을 읽으면서 이로 인해 겪었던 많은 트라우마가 떠올랐다. 이 책이 나의 상처를 일부 설명해 준다고 느꼈다. 또 ‘우울증적 이주자’에 대해 읽을 때에는 그걸 ‘우울증적 페미니스트’라는 개념으로 바꾸어 생각해 보며 (260~) 내가 그 상처를 어떻게 잊었나 혹은 잊지 못했나, 그 (성차별주의의) 기억을 잊기 위해 해당 상처를 어떤/누구를 매개로 화해의 순간으로 전환시켰나 혹은 그러지 못했나 하는 걸 떠올려 보기도 했다. 다른 분들도 혹시 이렇게 분위기 깨는 트러블메이커로서의 경험이 있을까? 있다면 그건 어떤 경험이었을까? 그런 사건들을 지금까지 어떻게 해결 혹은 소화해 오셨을까?
2. “페미니즘이 여성을 행복하게 하는 게 아니라, 행복의 전시에 동조하기를 거부함으로써 무언가의 발견을 가능케 하는 지평을 넓히는데 참여할 수 있다”는 말, “이런 신체적 지평들의 확장을 통해 무엇을 발견하게 될지 보장해 주지 않지만 우리가 볼 수 있는 장소들을 열어” 준다는 말이 인상깊었다(128).그렇다면 ‘나는 페미니스트야’ 라고 말 할 때, 그 의미를 ‘나는 기존에 주어진 행복에의 동조를 거부할 때 무언가를 발견케 하는 지평을 넓히고 그걸 볼 수 있는 장소를 열어내려고 하는 사람이야’ 라고 말하는 것으로 생각해 볼 수 있을 것 같다. 페미니즘이 결론적으로 여성의 행복을 ‘보장’하지 않는다는 것은 어떤 측면에선 좌절스럽게 느껴질 수도 있지만 다르게 보면 오히려 다양한 참여와 대안의 창조가 가능하다는 희망일 수 있다는 생각이 든다. ‘여성’에게 좋은 답을 보장하는 게 아니라 새로운 가능성을 연다는 측면에서, 꼭 이분법적으로 '생물학적인 여성’(이것도 분명치 않은 개념이지만)이 아니더라도 다양한 정체성의 사람들이 페미니즘에 참여할 수 있는 가능성을 이 말들을 통해 상상해 볼 수 있지 않을까? 특히 페미니스트란 말이 ‘여자만 위하고 남자에게는 해를 입히는 이기적인 여자’란 의미로 완전히 오염된 요즘, 페미니즘은 여성의 것만은 아니란 것을 행복의 담론과 연결해 어떻게 함께 이야기 해 볼 수 있을까? 이 책에서는 여전히 ‘여성’의 의미를 좀 좁게 쓰고 있다는 생각이 들기도 하는데, 분위기를 깨고 새로운 가능성의 장소들을 열어내는 페미니즘의 실천에 어떻게 하면 여러 성별과 정체성들이 함께 참여하도록 할 수 있을까?
3. p.234에서부터 식민지에서의 교육에 대해 나오는데 원주민의 교육의 의미가 “원주민에게 행복으로 가는 길, 즉 문명화로 가는 길을 가르치는 문제”(235)이며 “행복 추구권과 같은 양도 불가능한 권리들을 회복”(235)하는 것이지만 이것은 “또한 행복을 추구하지 않을 권리 혹은 이 행복 개념을 자신의 목적으로 삼지 않을 권리를 상실하는 것이기도 하다”고 한다 (235). 여기서 요즘 우리 아이들에게 어른들이 하고 있는 일이 겹쳐졌다. 아이들을 행복하게 만든다고 하면서 아이들을 “타자”에서 “개인으로 전환시”켜 “식민 지배자의 규범, 가치와 실천을 향하도록 함으로써 돌려세우는 것” (234)으로서의 교육을 하고 있지는 않는지. 이 사회가 원하는 행복의 개념을 추구하지 않고 목적으로 삼지 않을 아이들의 권리를 인정하지 않고 “좋은 습관을 획득”하여 (236) “여전히 식민지 주민의 신체와는 뚜렷이 다른 신체에 몸담”고 있을 때에도 “흉내”를 내며 “거의 행복하지만 아주 행복하지는 않은, 즉 거의 행복하지만 백인은 아닌 주체” (236)혹은 경쟁의 승리자는 아닌 그런 주체가 되도록 하는건 아닐까?
4. 4장은 영국에 사는 이주자 입장에서 행복의 담론이 어떻게 작동하는지를 중심적으로 다룬다. 조금 다른 역사와 맥락이 있는 우리나라에 살고 있는 이주자들은 어떠할까? 영국처럼 절대적인 백인 제국주의 국가의 행복 담론이 지배하지 않는 (그러나 아마도 그런 영향 안에 얽혀 있기는 할) 우리나라에서의 인종차별은 어쩌면 더 복잡하게 작동하고 있지 않을까? 우리나라에 살고 있는 다양한 나라에서 온 이주자들은 어떤 행복의 약속 안에서 살고 있을까? 이주자들의 인종적 성적 경제적 특성에 따라 그들에게 작동하는 행복의 약속도 혹시 다 다른 것은 아닐까? 우리 나라의 이주자들이 겪는 이민자의 우울증은 어떤 것일까? 행복의 판타지를 깨고 약속된 행복 아래 감춰진 불행의 역사들을 말하려는 시도들이 있어왔다면 그건 어떤 모습이었을까?
내 파트너는 행복할 수 있는 방법을 찾느라 바쁘다. 지금 그의 상태가 불행한 것은 아닌 것 같지만, 매일 행복 추구와 관련된 책을 구입하고 읽는다. 행복이라는 것이 자신이 추구해야할 삶의 궁극적인 목적임에 한치의 의심도 없다. 자신의 본성이 쉽게 행복해지는 사람이 아니라고 평가하며 행복이라는 목적을 달성하기 위한 방법을 모색하는 데 진심이다. 내가 가정 내 불평등한 노동 구조에 대해 말하기 시작하면 그것은 젠더에 기인한 불합리한 것이 아니라 임금 차에 따른 정당한 것이라는 답이 돌아온다. 그 답에 대한 논리적 오류를 지적하면 “또 시작이군”이라는 표정이 돌아온다. 행복을 추구하는 내 파트너에게 나는 행복 방해꾼이다. 분위기를 깨는 행복 방해꾼. 내가 파트너의 행복 방해라는 행위를 통해 (의도했거나 의도하지 않았지만) 야기한 결과는 무엇일지? 행복이라는 코드가 감추고 있는 폭력을 일시적이나마 드러내는 것? 감춰진 것을 드러내는 것이 나와 가족들에게 상처 이외의 결과를 가져오기는 할지? 그렇다면 어떠한 결과를 가져올 수 있을지? 저자는 행복으로부터의 소외를 인식하면서 연대할 수 있고, 분위기를 깨는 데 즐거움이 있을 수 있으며, 분위기를 깨는 것은 내가 해야하는 일이라고 말하는데, 나는 내 몸에 각인된 소진의 경험으로 저자의 희망찬 연대의 손짓에 회의적이다! 오히려, 브라이도티의 긍정의 연대, 긍정의 정치학이 무엇일지 궁금하다!
2009년 정도 되었을 때, 박사과정생이었던 나는 스타벅스에서 가야트리 스피박의 “서벌턴은 말할 수 있는가?”와 씨름하고 있었다. 난해하기 그지없던 그 텍스트를 반 정도 읽고 반 정도 흘려보내다가 어느 지점에선가 갑자기 울기 시작했다. 말도 안되게 눈물이 났다! 서벌턴, 즉 사회에서 배제되는 존재가 자신의 존재를 구조적으로, 존재-인식론적으로 배제하는 맥락에서 과연 말을 할 수 있는 건지에 대한 글을 읽다가 울었다. 작은 일 하나하나가 인종차별로 느끼고 있었던(어떤 때에는 내가 과하게 민감한가라는 자책을 하기도 했다) 상황에서 스피박의 글이 눈물샘을 자극했던 것 같다. 사회정의를 주장하며 (일부) 흑인 학생들의 엄마를 자처한 한 교수의 배제성에 대한 원망을 담은 눈물이었을 것도 같다. 그때, 그 순간의 나는 통합을 원했던, 그러나 통합에 실패하며 공허함을 느낀 정서 이방인이었을 텐데, 그 정서가 무엇을 했을까? 어떤 일을 했을까? 그 이방의 정서를 가지고 그때 나는 무엇을 했을까? 혹은 하지 못했을까? 혹은 무얼 다르게 했어야 했을까?
“우울증적 이주민” 개념을 자발적으로 고향으로부터의 탈주를 꿈꾸는 지금의 나에게 적용해볼 수 있을까? 자발적 이주민, 탈주자에도 상실이 있을지? 그렇다면 어떠한 상실일지? 자발적 이주민도 이방의 정서를 가지고 무언가를 할 수 있는 사람일 수 있을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