Haraway. D. (1994). 종과 종이 만날 때 1장(종과 종이 만날 때: 서문)(pp. 11~61)과 8장(접촉지대에서의 훈련: 어질리티 스포츠에서 권력, 놀이, 발명)(pp. 255~308)을 읽고 5월 10일까지 글에 대한 질문 2-3개를 이 글에 대한 댓글로 올려주세요.
(책이 없으신 분들을 위해 읽기자료 게시판에 PDF파일을 올려두었습니다~!)
질문은 어떤 질문이든 괜찮습니다. 남들에게 멋져보이는 질문 말고, 진짜 내가 궁금한 질문, 다른 사람들과 함께 이야기 나눠보고 싶은 질문을 올려주세요. 이게 도대체 무슨 말인가요 하는 질문도 또 자신의 관심분야와 접속시켜 좀 더 멀리까지 연결 해 본 질문도 좋습니다. 부끄러운 마음으로 쓴 이상하고 솔직한 모든 질문들을 환영합니다~!!
질문을 올릴 때에는 글의 어떤 부분에서 생긴 질문인지 알 수 있도록 그 맥락을 질문에 포함해 주세요.
가령, 몇 페이지 어디에서 저자들이 뭐라뭐라고 하는데~ 하는 식으로 그 질문이 나온 맥락을 간단히 정리한 다음 자신의 질문을 적어주시면 이야기 나눌 때 더 좋을 것 같습니다~
올려주신 질문들은 익명으로 모아서 모임 당일 대화에서 활용할 예정입니다.
함께 되기는 어떤 의미에서 세속적이게 되는 실천이라고 할 수 있을까? 함께 되기는 필멸의 육신이 서로에게 얽혀드는 ‘세계 만들기’의 실천이다. 세계-만들기는 조화로운 합일을 약속하지 않는 세속적인 실천이라고 말한다. 무구한 위치를 점하는 것도, 죽이기와 고통 주기에 대해 정당화로 둘러대는 것도 아니라면, ‘세속적이게 되는’ 실천을 진정한 의미에서의‘실천이라고 말할 수 있는가? 세속적 차이를 전제로 한 얽혀드는 관계 만들기는, 인간예외주의를 넘어서는 복수종의 공존이라는 측면에서 미네르바의 올빼미에 불과할 뿐 의미를 가질 수 있을까?
2. 우리는 푸바오와 어떤 접촉지대에서 만나고 있는가? 멸종위기종과 만나는 접촉지대가 낳는 오해와 예상되는 실패는 무엇인가? 멸종위기종에게 보이는 태도는 우리 인간이 무구하지 않음을 증명하는 하나의 사례이다. 그러나 그 무구하지 않음이 사육 환경의 취약성에 주목하고 사육사는 응답 책임을 다하려 한다. 인간인 우리는 멸종위기종이라고 불리는 크리터들(판다)와 만날 때 ‘우리’는 어떤 자들이 되는가? 대안-세계화(오토르-몽디알리자숑) 나는 유투브라는 손가락 눈으로 푸바오를 만진다. 이런 유산으로 을 시각으로 만지는 것이 동물원에 사는 여러 멸종위기종 크리터들에게 대한 응답이라고 할 수 있는가?
3. 나의 반려종은 누구인가? 해러웨이가 반려종인 카옌을 상호 훈련과 돌봄으로 만지면서 만져지는 서로의 파트너가 되어 왔듯이, 하반신 마비 장애인인 프랭크 해러웨이에게 반려종인 목발과 휠체어가 있어 그의 신체를 유능하게 사용할 수 있었듯이, 제4차 산업혁명 시대를 살아갈 아이들에게는 챗GPT와 같은 생성형 AI가 삶의 반려종일 것이다. 학습격차나 정보격차가 심하거나 스마트폰 중독 중세를 보이는 아이들에게, AI와 내부-작용적으로 서로 얽히는 배움으로 삶을 담지하는 수업은 어떻게 해야 할까? 하루아침에 만들어지지 않는 A자 프레임의 접촉지대에 정확하게 착지하려는 유익한 소화불량 수업을 교사인 우리는 비인간 반려종 AI와 어떻게 만들어가야 하는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