Kafer(2013/2023)의 책 <<페미니스트, 퀴어, 불구: 불구의 미래를 향한 새로운 정치학과 상상력>>의 1장 "장애학의 시간과 불구의 미래"와 3장 "페미니즘적 미래에 대한 논쟁: 시끄러운 경사로, 문화적 불안, 농인 레즈비언의 사례"를 읽고 2024년 1월 5일까지 글에 대한 질문 2-3개를 이 글에 대한 댓글로 올려주세요.
지난 번과 마찬가지로, 남들에게 멋져보이는 질문 말고, 진짜 내가 궁금한 질문, 다른 사람들과 함께 이야기 나눠보고 싶은 질문을 자유롭게 올려주시면 됩니다.
다만, 한 가지,
이번 주는 주제가 "페미니스트, 퀴어, 불구"인만큼 우리 모임 안에도 "페미니스트, 퀴어, 불구"의 당사자가 이미 함께하고 있다는 것을 전제하고 질문을 올려주시면 좋겠습니다~!
질문을 올릴 때에는 글의 어떤 부분에서 생긴 질문인지 알 수 있도록 그 맥락을 질문에 포함해 주세요.
가령, 몇 페이지 어디에서 저자들이 뭐라뭐라고 하던데~ 하는 식으로 그 질문이 나온 맥락을 간단히 정리한 다음 자신의 질문을 적어주시면 이야기 나눌 때 더 좋을 것 같습니다~
부끄러운 마음으로 쓴 이상하고 솔직한 모든 질문들을 환영하며, 아무데서나 시작해 아무데로나 연결접속 해 가보는 또 한 번의 리좀 대화를 열어 줄 다양한 출입구-질문들을 기다려봅니다~!
올려주신 질문들은 익명으로 모아서 모임 당일 대화에서 활용할 예정입니다.
읽기자료 게시판에 PDF파일도 올려두었으니 책이 없으신 분들은 참고해 주세요~
(이번에도, PDF파일은 빼꼼이 스캔해주셨어요. 감사합니다~!!😀)
84
하지만 ‘불구의 시간’은 이처럼 시간을 제한 없이 연장한다는 의미보다 더 많은것을 함의한다. 그것은 바로 시간을 재지향 하는 것이다.
마거릿 프라이스의 설명처럼
”불구의 시간을 지지한다는 것은…… 사람들이 다양한 간격으로 도착할 수 있다는 점을 인식하고 , 그에 따라 행사를 기획하는 것을 의미할 수 있다.
또한 그것이 (사람들이) 다양한 속도로 언어를 구사한다는 것을 인식하고, 대화의 속도를 조절하는 것을 의미하기도 한다.
이것이(단지’추가적인’시간이 아닌)유연성의 개념이 뜻하는 바다.”
불구의 시간은 단순히 연장되는 시간이 아니라, 폭발해버리는 유연한 시간이다. 불구의 시간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제시간 안에 어떤 일이 일어날 수 있고, 어떤 일이 일어나야 하는지에 대한 우리의 관념을 재상상하거나, 얼마나 오랜시간이 걸리는지 에 대한 기대가 어떻게 아주 특정한 마음과 몸에 기반하는지 인식할 필요가 있다.
85
어떻게 시간을 사유해야 장애학에 대한 , 그리고 장애학을 위한 새로운 시각을 열 수 있을까?
또는 어떻게 ‘불구의 시간’을 관찰해야 시간과 미래성을 더 확장된 개념으로 이끌 수 있을까?
88
나는 질병과 장애, 불구의 시간이 어떻게 퀴어의 시간에 항상 이미 존재했는지를 탐구하면서 장애의 렌즈를 통해 퀴어 시간성을 읽었다.
세번쨰로, 나는 장애를 통해 퀴어의 시간을 읽는 작업을 이어가면서, 장애가 퀴어의 시간을 넘어서는 것으로 보이는 지점을 지목했다.
나의 관심사는
우리가 이런 단절된 지점을 활용해 어떻게 퀴어의 시간과 불구의 시간을 모두 확장할 수 있는지에 있다.
133
우리는 시간 안에서 장애를 탐구해야한다.
**시간적 용어로 장애를 개념화 해 온 것 묘사해 온것, 시간적 틀로 설명해 온 것에서
그 시간을 재지향 하고 이해하고 재상상 할 수 있는 가능성과 더 확장된 개념으로 이끌 수 있는가 라는 질문에 좋았습니다
확장 을 통해 다른 시간성을 상상하는 것에 대한 생각들이 궁금해집니다.
131
나는 “장애를 양성하는 것”이라는 표현을 쓰는 것도 우려스러운데, 왜냐하면 그런 정의의 버전이 어떤 모습일지 상상하는 것이 거의 불가능하기 떄문이다.
이 책은 그것을 상상하기 위한 시도다.
불구의 미래에 대한 욕망을 헤더 러브의 표현대로 “절망과 떼려야 뗄 수 없는 희망”이다.
나는 그 희망을 느끼고 있으며, 이 희망은 그만큼 강력하고 맹렬하다. 왜냐하면 희망은 우리의 궁핍한 상상력이 만든 절망에서 태어나고 그 절망과 공존하기때문이다.
주디스 버틀러는 우리의 상상을 변화시키면, 우리의 상황을 변화시킬 수 있다고 말한다. 그녀는 환상이 “우리 자신과 다른 사람들을 다르게 상상해볼수 있게 해주는 ””비판적인 전망”을 담고 있다고 주장한다.
*궁핍한 상상력, 상상력을 변화시키는 것에대한 이야기를 나누어보고 싶어요.
132
인정과 부재의 뒤섞임, 절망과 희망의 뒤섞임은 내 욕망을 상당히 퀴어하게 만든다.
나의 바람, 갈망 , 쾌락은 이런 불구의 몸들, 이런 퀴어의 미래가 지닌 퀴어성과 함께 강화된다는 점에서 퀴어하다.
불구의 미래를 상상할 때, 특정하고 식별 가능한 몸을 넘어선다는 의미에서 역시 퀴어하다.
가능성, 예측 불가능성, 전망이 된다는 의미에서 그렇다.
예상치 못한 곳에서 불구를 인식할 수 있다는 전망, 눈앞에서 불구의 의미가 바뀌는 것을 볼 수 있다는 가능성 말이다.
나는 그 애매함 떄문에 이 욕망을 ‘퀴어하다’라고 명명한다.
***“넘어선다” “애매함”
218
수전 웬델은 장애나 질병과 함께 사는 것이 “삶과 세상에 대한 가치있는 관점을 제공하는 가치 있는 존재방식을 만들어낸다.”
장애가 잇는 사람들은 장애 덕분에 비장애인이 가질 수 없는 경험, 비장애인이 바로 접할 수 없는 지식을 제공하는 경험을 가질 수 있게 될 것이다.
예를 들어 , 그 지식의 일부인, 고통받는 몸과 함꼐 살아가는 방법 같은 지식은 거의 모든 사람에게 매우 실질적인 도움이 될것이다….
그 지식 대부분은 우리 문화를 풍요롭게 하고 확장할 것이며, 그 지식의 몇몇에는 우리의 생각과 삶의 방식을 근본적으로 바꿀 수 있는 잠재력이 있다.
**#확장, #삶의 방식 , #존재방식, #근본적, #잠재력
84~85) 불구의 시간을 작동시키는 것은 느린 이동 속도뿐만 아니라 거의 또는 전혀 통제되지 않는 비장애중심주이적 장벽이기도 하다.... 어떤 사람들에게 '더 많은' 시간이 필요하다는 사실을 인식하는 것은 아마도 학계에 있는 우리가 불구의 시간을 드러내는 가장 익숙한 방식... '불구의 시간'은 이처럼 시간을 제한 없이 연장한다는 의미보다 더 많은 것을 함의한다. 그것은 바로 시간을 재지향하는 것이다. ... 불구의 시간을 지지한다는 것은... 사람들이 다양한 간격으로 도착할 수 있다는 점을 인식하고.... 다양한 속도로 언어를 구사한다는 것을 인식하고, 대화의 속도를 조절하는 것을 의미... 유연성의 개념이 뜻하는 바다... '얼마나 오랜 시간이 걸리는지'에 대한 기대가 어떻게 아주 특정한 마음과 몸에 기반하는지 인식할 필요가... 불구의 시간은 장애 있는 몸과 마음을 시계에 맞추는 대신, 시계를 장애 있는 몸과 마음에 맞춘다.
'불구'라는 단어와 '시간'이라는 단어가 연결되어 서술된 첫 부분 읽기 자료가 불편하면서 동시에 흥미로움을 주었습니다. 특히, '시간'이라는 개념을 우리 모두는 자연스럽게 사용하곤 있지만 실제적으론 시간이 어떤 개념인지 명확하게 설명할 수 없다는 물리학자들의 이야기와, 시청 시계탑이 가진 의미 속에 시간을 통제하고 관리하는 것에 권력이 있었음을.. 그래서 각각의 시청이 가졌던 시계탑 속 시간이 달랐던 시절이 있었는데 교통수단의 발달과 더불어 기차가 다니기 시작했고 기차 시간을 맞추기 위해 모든 곳에서 시간의 통일이 필요해졌고 지금 우리가 사용하는 표준시간이 나왔다는 이야기까지... 인간이 시간에 맞춰서 살아가고 있음을.. 표준 시간은 특정한 몸과 마음에 기반한 것임을 생각하는 부분이었습니다. 수업을 하는 사람으로써 신경쓰이는 것들 중 하나가 수업을 디자인하며 아이들과 함께하는 수행시간을 고려하는 것인데 제가 그동안 해 온 모든 수업 디자인의 시간 고려엔 아주 특정한 몸과 마음을 당연히 기준으로 삼아왔음을... 돌아보게 되었습니다.
89) 에덜먼은 미래성이 거의 언제나 재생산의 용어로 표현된다고 주장하면서 우리는 "(대문자) 아이 the Child 의 형상 없이 미래를 상상"할 수 없다는 ...
91) 이러한 재생산적 미래성이 트영된 곳에서는...
96) 아이들을 이상화하는 재생산 미래주의에 대한 에덜먼의 경고는 ..
133) 우리 모두를 돌보지 않고, 포용하지 않고, 욕망하지 않는 것은 나의 손실이자 우리의 손실이다. 우리는 우리 모두를 포함하는 현재를 기대하고, 미래를 상상하는 것을 시작해야 한다. 우리는 시간 안에서 장애를 탐구해야 한다.
미래는 기존의 것이 아닌 새로움이 더 큰 이미지로 생각하고 있었던 기존의 내 생각에 쿵 하고 충격을 준 단어들이 '재생산적 미래'였습니다. 그리고 대문자 아이의 형상없이 미래를 상상할 수 없다는 이야기는 교육을 담당하고 많은 아이들을 만나며 나도 모르게 상정하는 이상적인 아이의 모습을 고정해놓고 있는 것은 아니었는지를 생각하게 되었네요. 정말 중요한 것은 '우리 모두'라는 사실을 133쪽을 읽으며 다시 생각한 부분이었습니다.
187~219) 전체적인 내용 중 "산전 검사", "인공 발육장", "매타포이셋", "기술적 개입과 혁신", "유전공학", "재생산 기술", "착상 전 유전자 검사" 등
3장 페니미즘적 미래에 대한 논쟁에선 유난히 기술에 대한 부분이 많이 등장하는 느낌이었고, 기술과 관련된 용어나 기술친화적 단어들이 우리에게 무엇이 더 자연스러운 것인지, 무엇이 더 합리적인 선택인지를 알려주는 척도처럼 보이는 것 같았습니다. 이 부분이 저에겐 기후위기를 최첨단 기술로 해결할 수 있고 그래야 한다는 이야기와 비슷하다는 생각을 하게 한 것 같았습니다. 그런데 기술이, 기술적인 접근이 비기술적이고, 덜 합리적이며 덜 객관적인 접근보다 앞서는 세상이 우리가 원하는 세상일까요? 기술의 발달이 우리에게 주는 혜택을 부정하자는 것이 아니라 그 너머를 봐야 한다는 생각을 하게 되었습니다. 다른 분들은 어떤 생각이신지 궁금합니다.
1.“자녀를 게이가 될 수 있도록 돕는 방법을 조언”해주는 사람과 기관을 상상하고 경험할 수 있는 시기가 올 때까지 억압은 지속될 것이라고 경고한다.(130) / 퀴어의 삶을 가치있다고 여기지 못하는 상황이 장애인의 삶을 상상하지 못하는 상황과 연관된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퀴어성을 키우거나 이를 지원하는 기관을 만들고 싶어하지 않는 상황은 장애를 양성하는 것을 두려워하는 상황과 얽혀있다.(131)
이것이 현실의 ‘이상적인’ 한계 같다는 생각이 듭니다. 퀴어성이나 장애가 ‘존재’하는 사람들을 존중한다는 것은 함께 살아가기 위해 인정하고 받아들이고 노력하는 의미이면서도 그 존재들을 더 많이 만들어 내는 것은 두렵다는 것이 온전히 함께 살아갈 준비가 되지 않은 것은 아닐까 싶고요.
장애라는 것이 사회에 긍정적인 영향을 미치지 않고 마이너스의 요소가 더 많다고 여기기 때문은 아닐까 싶은데, 퀴어와 장애에 대한 깊은 편견 때문은 아닐지 얘기 나눠보고 싶습니다.
2.농인 아기들은 “특별한 축복”이라고 했던 캔디도 시각장애 아이를 가진다면 장애를 고치려고 노력하리라는 것을 인정하고, “난 내 아이와 똑같이 되고 싶고, 우리가 즐기는걸 아기도 즐겼으면 좋겠다”(207)라는 부분을 1장의 ‘소유했던’적이 없는 사람들에게 ‘잃어버렸다’는 개념이 불가능한 것(126)과 연관지어 생각해봤습니다.
우리는 모두 내가 살아온 방식에 국한되어 상상할 수 밖에 없고, 그 세상이 그리 나쁘지 않았다면 나의 아이에게도 비슷한 세상이면 괜찮을 것이라고 생각하게 되는 것은 아닐까 싶어요.
아이들을 국한된 상상속에서의 가능성이 아니라, 더 다양한 가능성을 가진 존재가 될 수 있도록 하기 위해서는 ‘소유했던’적 없는 방식의 삶을 직/간접적으로 더 많이 경험하게 하는 것이 중요하지 않을까요? 그러려면 1번의 질문 내용처럼 어쩌면 퀴어와 장애를 양성하는 것을 두려워하지 않는 것에서부터 시작해야 하지 않나 싶어요. 장애를 양성한다는 말을 어떻게 느끼셨는지 궁금합니다.
장애가 있는 사람들은 장애 덕분에 비장애인이 가질 수 없는 경험, 비장애인이 바로 접할 수 없는 지식을 제공하는 경험을 가질 수 있게 될 것이다. 예를 들어, 그 지식의 일부인, 고통받는 몸과 함께 살아가는 방법 같은 지식은 거의 모든 사람에게 매우 실질적인 도윰이 될 것이다(p. 218)." 사례도 해법도 너무 충격적인 이야기였다. 장애를 제거 하는 것으로 여기는 것은 고통을 제거하기 위해 애쓴 나의 삶으로서는 이해가 안가는 일로 여겨진다. 우리는 고통에 대해 언떤 관점을 가지고 있는가? 하버드생들의 졸업후 종적 생을 추적하면서 행복조건을 이야기 할때 1위가 고통을 대하는 성숙한 자세라고 했던것도 기억이 난다. 고통이든 고통 받는 몸이든 이것은 제거 대상인가? 아니면 친해져야 하는 또 하나의 존재로 바라본다는 것은 무엇인가?
장애를 극복의 대상이 아닌 차이의 형태로 보고, 그것이 가치 있는 것일 수도 있다는 가능성을 진지하게 받아들이는(218P) 관점에서 교실 풍경을 떠올리지 않을 수 없다. 심한 장애를 앓는 친구와 정겹게 지낼수 있는 한가지 방법이 있었는데 어느날 그 친구가 예전처럼 다가오지는 않는다. 키도 처음보다 커졌고 표정도 변하는데 사춘기가 왔구나 하는거였다. 자신에 대한 인식을 하는 중인걸가? 그 친구가 주는 불편함에 학급 친구들도 멀어지는데 중학생 학급을 맡을때 장애- 비장애 학생이 화학적 통합이 이루어진걸 본 경험은이 없다. 나 역시 장애를 배려의 대상으로 바라보고 교육은 했지만 다양성의 하나인 관점으로 교육해본적은 없었던것 같다. 관점의 변화를 가져올 수 있는 교육으로 무엇이 있을까?
"장애가 있는 사람들은 장애 덕분에 비장애인이 가질 수 없는 경험, 비장애인이 바로 접할 수 없는 지식을 제공하는 경험을 가질 수 있게 될 것이다. 예를 들어, 그 지식의 일부인, 고통받는 몸과 함께 살아가는 방법 같은 지식은 거의 모든 사람에게 매우 실질적인 도윰이 될 것이다(p. 218)." 이러한 접근은 너무나도 비장애인의 입장에서 장애인의 '가치'를 판단하고 평가하는 것이 아닌가? (장애이든 비장애이든) 인간 그 자체로서 존중하는 것이 아니라 "비장애인은 절대 알 수 없는 정보(고통 받는 몸과 함께 살아가는 방법)를 알고 있으니 그것으로 그들은 가치가 있다"라고 읽히는데, 내가 글의 맥락을 잘 파악하지 못한 것일까? 만약 끔찍하게 고통 받는 "장애를 제거하는 것"도 "세상에 존재하는 대안적인 방식들을 발견할 가능성을 제거"하는 것이며, 우리의 "상오의존성을 인정하고 그것을 가치있게 평가할 가능성을 배제"하는 것일까? (p. 219)
농인 아이를 갖기 위해 의도적으로 애쓴 농인 레즈비언의 도전에 적대적으로 반대한 이들에게 '대체 니들이 무슨 권리로?'라고 반발하면서도 유전에 의해 장애를 가지고 태어난 나의 강아지가 다리를 절며 지나가는 것을 보면서 "대체 유전병이 있다는 걸 알면서 왜 교배를 시켰던거야?"라고 고개를 내젓는 나 자신에게 혼란스러워진다.
"장애활동가들은, 현재의 장애인이 가진 욕구와 경험을 무시한 채 (장애인을 존재하지 못하게 막음으로써) 미래의 장애인을 '치유'하는 데만 경제적 문화적 자원을 쏟아붓는 끝없는 유예의 정치에 오랫동안 격분해왔다. 미래성에만 집중하는 이러한 방식은 장애인에게 득이 되지는 않았으나, 장애를 표현하는 데는 흔한 방법 중 하나였다" (pp. 91-90)
본문에 나온 "미래성에만 집중하는 방식"이 장애의 범주를 넘어서서 우리 사회에 다른 방식으로 다른 대상에게 존재하고 있지는 않는지? 어떠한 논리로 우리를 현혹하며 그로 인해 유지/강화 될 status quo는 무엇인지?
최근 내 머릿속에 떠오르는 생각/단어들: 젊은 세대, 기성세대, 중위나이, 출산율 절벽, 우리의 미래, 정치인들의 주장, 어린이, 미래의 정책, 투표권, 동일성, 생산성, 한국 사회가 강조하는 것들 등등
1. 장애 없는 몸/마음을 기본값으로 여기고, 장애 있는 마음/몸은 치유되거나 치유를 행해 나아갈 때만 적절하다고 보는 비장애중심주의(그 외에 이성애중심주의, 인종차별주의도)는 일종의 에피스테메가 아닌가? 그렇다면 비장애중심주의는 산업자본주의적 권력의 시선을 내면화한 판옵티콘 시스템(규율 훈련, 생명정치)의 결과로 볼 수 있지 않을까?
2. 앨리슨 케이퍼가 장애의 렌즈로 투영한, 도나 해러웨이의 사이보그론, 환경 및 생태이론 등이 장애와 질병의 몸을 간과하거나 바람직하지 않은 것으로 전제하고 있는 구체적 논리는 어떤 것인가?
앨리슨 케이퍼는 장애의 렌즈를 통해 페미니즘과 퀴어 서사가 놓치고 있는 단절된 불구의 시간성을 보여주고 확장의 가능성을 생각해 보자고 한다. 그렇다면 퀴어의 시간과 불구의 시간이 모두 확장되는, 삶과 세상에 대한 가치 있는 관점을 제공하는 가치 있는 존재 방식(수전 웬델의 표현)은 어떻게 구현될 수 있을까? (앨리스 케이퍼가 주목한 페미니즘, 퀴어, 불구의 결과물로서의 공중화장실이 갖는 연합 정치적 모습이 궁금해진다.)
앨리슨 케이퍼는 인종, 계급, 젠더, 섹슈얼리티라는 렌즈 외에 세상을 보고 실천-이론으로 연결하는 장애라는 렌즈를 선물로 주고 있다. 교사인 나는 이러한 렌즈들을 교실(학교)에서 어떻게 연결하는 실천을 할 수 있을까? 우리가 놓치고 있는 또다른 렌즈는 어떤 것들이 있을까?
3. 앨리슨 케이퍼는 퀴어의 시간이 갖고 있는 주변화되고 부인되는 시간적 경험을 불구의 시간과 중첩하여 연결하고, 진단/ 비진단/ 오진에 관한 질문을 인종, 계급에 관한 의문과 유사하게 묶여 있다는 생각으로 이런 질문을 던진다.
“백인 학생에게 더 잘 적용되는 것처럼 보이는 ‘학습장애’와 유색인 학생에게 더 잘 적용되는 것처럼 보이는 ‘행동/정서장애’라는 꼬리표는 어떻게 인구 집단에 따라 다르게 부착되어 왔는가? 왜 특수 학급에는 유색인 학생 비율이 백인에 비해 높은가?”
이와 유사한, 불구의 현재에 해당되는 사례를 교실(학교)에서 찾는다면 어떤 것이 있을까?
1. 저자는 퀴어성을 키우거나 이를 지원하는 기관을 만든다든가 장애를 양성한다든가 하는 것에 대한(130-131) 사람들의 두려움을 이야기하며 이 책이 “상상하는 것이 거의 불가능”한 이런 것들을 “상상하기 위한 시도”라고(131) 이야기한다. 이런 상상은 먼 타인의 이야기가 아니라 나의 아이/가족/학생의 이야기가 될 경우 더 어려워지는 것 같다. 이 책을 읽으며 흔히 부모/교사/어른들이 어린 아이/학생들을 보면서 하게 되는 ‘내/우리/이 아이/학생은 커서 뭐가 될까? 누구와 만나 사랑하게 될까? 어떤 삶을 살게 될까?’하는 질문이 떠올랐다. 이 질문은 보통 아이의 미래의 삶이나 직업, 관계 등을 궁금해 하며 기대하고 축복하는 마음으로 하게 되는 질문인 듯하다(물론 요즘은 기후위기나 극심한 경쟁 등의 조건들 때문에 이런 질문들이 마냥 희망적인 것은 아니지만 어쨌든..). 이 책은 어떤 의미에선 우리에게 자신의 아이/가족/학생에게 기대와 축복의 마음으로 ‘이 아이는 커서 어떤 퀴어/불구가 될까?’ 하는 질문을 할 수 있느냐고 묻는 것 같기도 하다. 혹시 이런 질문을 해/가져 본 적이 있는지? 그러면서 기대, 호기심, 축복하는 마음을 느껴 본 적이 있는지? 그런 질문을 묻는 것 그리고 물으면서 기대를 느낄 수 있는 것은 어떤 희망, 이해, 조건, 관계성, 시간성 등등에서 가능했는지 혹은 가능하게 될 거라 생각하는지?
2. 저자는 “시간이 정상성 생산의 기초가 된다”(105)고 하며, “시간을 재지향하는” 작업(85), “단순히 연장되는 시간이 아니라, 폭발해버리는 유연한 시간”을 상상하고 “속도와 일정에 대한 기대의 규범화와 정상화”에 도전해야(85) 한다고 주장한다. 퀴어/불구적 시간성이 당연해진다면 더 많은 것이 가능하고 더 많은 길이 상상될 수 있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다른 분들은 규범/정상화된 시간성에 대해 평소 어떤 관계를 맺어 오셨을까? 이런 퀴어/불구적 시간성을 희망해 보신 적이 있으실지? 시계에 나를 맞추는 게 아니고 퀴어/불구적 나에게 시계를 맞춘다면 (즉 현재에 집중하는 이상한 시간성(106), 지나가지 못하고 떨어지며 동시에 실패하고 성공하는 시간성(108), 나/타인/물질들의 과거현재미래가 뒤섞인 시간성(114), “생산성, 성취도, 효율성” 등에 도전하는 시간성(118)을 가진다면..) 각자/우리의 삶을 어떻게 새로이 상상할 수 있을 것 같은지?
3. 물고기라는 별명에도 일부 드러나 있듯 나는 퀴어가 아니면서(?) 스스로를 퀴어로 부르고 싶다는 “욕망”(129)을 느껴왔다. ‘왜 나는 나를 퀴어라 하고 싶을까, 해도 되는 걸까, 어떤 의미에서 할 수 있는 걸까’ 하는 고민이 꽤 있었는데 이 글을 읽으며 나를 불구라 부르는 것에 대해 생각해 보게 되었다. 특히 “불구의 시간성”을 읽으면서 어쩌면 나는 이미 처음부터 불구였다고 생각이 들었는데, 퀴어/불구의 특수성, 어려움, 현실을 지우지 않으면서도 보통 퀴어/불구로 여겨지지 않는 내가 퀴어/불구라고 선언하는 것은 가능할까? 어떻게 가능할까? 어떻게 가능해야 바람직한 것이 될까? 그렇게 할 때 나의 삶에서 또 나의 일에서 무엇이 새로이 가능하게 될까? 우리 모두가 자신을 그렇게 (그 “윤리적, 인식론적, 정치적 책임을 인식”하며(54)) 이미 퀴어/불구로 이해/선언한다면? 무엇이 달라질까?
3장에서 저자는 농인 아이를 갖기 위해 의도적으로 애쓴 농인 레즈비언 커플과 그것을 둘러싼 논쟁에 대해 조명하며, 레즈비언 커플의 이야기를 주류의 이야기에 대한 ‘대항서사’로 읽어야 한다고 주장한다. 그러나 3장 마지막 부분에 레너드 데이비스의 주장, 즉 “농과 장애를 선택하는 이러한 방식의 재생산 결정이 ‘억압에 맞서 싸우는 급진적인 방식’인지 아니면 ‘보수적이고 본질주의적인 의제에 봉사하는 기술적인 계책’인지 질문할 필요가 있다는 주장을 인용하며, 자신의 논의를 조금 더 복잡화한다. “여아를 선택하는 것은 남아를 선택하는 것만큼 문제가 될 수 있다”고 이야기하며, “누구를 선택하든 모두 협소한 젠더 규범에 의존하기 때문”이라고 설명한다. 이와 같이 “장애를 선택하는 것도 장애를 선택하지 않는 것만큼 비장애인정체성 범주를 현실화할 수 있다”고 덧붙인다. 이를 토대로 “특정한 선택이 특정한 맥락에서 어떻게 기능하는지 조사할 필요가 있”다고 주장한다(pp. 221-222).
농인 아이를 출산한 농인 레즈비언 커플의 이야기가 대항 서사라고 주장하는 동시에 그러한 주장을 보다 복잡화하는 저자의 서술이 흥미로울 뿐 아니라, 이 부분이 굉장히 중요하다고 생각한다. 이는 들뢰즈와 가타리가 <천 개의 고원> 1장에서 탈영토화와 재영토화가 동시에 일어난다는 서술과 연결된다. “서양란은 말벌의 이미지를 만들고 말벌을 본뜨면서 탈영토화되지만 말벌은 이 이미지 위에서 재영토화된다.. 한편, 말벌은 서양란의 생식 장치의 한 부분이 됨으로써 탈영토화되기도 하지만, 서양란에 꽃가루를 옮기면서 서양란을 재영토화한다”(p. 25). 이 레즈비언 커플의 이야기는 정상성 규범(강제적 비장애신체/강제적 비장애정신의 이성애)에 근간한 주류 이야기에 도전하고 저항하는 ‘대항서사’의 역할을 하는 동시에 장애와 비장애의 범주를 다시금 생성하고 그 경계를 공고히한다. 이 부분에 주목하는 것이 중요하다고 생각하는 이유는 이 대항서사로 이 이야기를 읽는 것이 갖는 가치, 들뢰즈와 가타리의 표현에 따르면 ‘전쟁기계’로서의 역할을 인식하고 그것이 굉장히 중요하다고 믿는 동시에, ‘해방담론’에 유의해야 하기 때문이다. 대항서사로서 이야기를 생성하되, 그것이 수행하는 탈영토화-재영토화에 함께 주목하는 것이 지금 우리가 위치한 이 세계의 복잡성에 ‘정의롭게’ 응답하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그렇다면 복잡성을 존중하되 정상성 규범에 대항하기 위한 방식으로 이 이야기를 어떻게 ‘더’ 진행시켜볼 수 있을까? 내가 저자라면, 3장 끝 부분에 어떠한 논의를 더해볼 수 있었을까?
저자는 ‘불구의 시간성’에 대해 논의하면서 112쪽에서는 예상의 시간과 관련하여, 화학물질과민증이 있는 사람들이 증상을 촉발하는 사건이나 화학물질 노출에 대비해 일상을 살피는 이야기를 한다. 115쪽에서는 창의로운 일상에 대해 이야기한다. 가까운 미래가 현재와 뒤섞이는 여러 사례를 제시한다. 활동지원사들과 함께 일하기 위해서는 화장실에 갈 때마다, 목용할 때마다, 취침할 때마다 미리 일정을 잡아야하는 사람의 이야기를 통해 “하나의 몸으로 존재하지만 현재의 몸에 거주하는 동시에, 문자 그대로 그 몸을 미래로 투사한다”고 이야기한다. 일직선적이고 규범적인 시간성을 비틀기 위한 다양한 자신의 이야기를 여기에 하나씩 달아본다면? 우선, 나는 대학원 생활을 미국에서 하면서 항상 말하기 전에 무엇을 말할 것인지 ‘미리’ 생각하고 머릿속에서 리허설한 후에 입밖으로 말을 내보냈고, 이것이 습관이 되어 한국에 다시 돌아왔을 때 그러한 절차를 생략해도 된다는 사실이 낯설었다. 미리 할 말을 생각했던 습관은 나의 broken English로 주변화되지 않기 위한 몸부림이었던 것 같다. 이는 저자가 말한 것처럼 현재의 몸에 거주하지만 그 몸을 미래로 투사하며 아직 도래하지 않은 미래의 시간을 현재 ‘안’에 품고 살아갔음을 보여주는 사례이지 않을까 생각한다.이처럼 선형적인 시간을 흐트러뜨리는 ‘이상한 시간성’의 이야기를 나누어보자! 전형적인 발달과 삶의 양식을 전제하는 시간, 그리고 거꾸로 정상성을 적극적으로 생성해내는 시간에 대한 규범적 서사를 함께 흐트려보자!
선형적인 시간성을 흐트려놓으려는 저자의 시간성 논의가 참 흥미롭다. 저자는 85쪽에서 “불구의 시간은 단순히 연장되는 시간이 아니라 폭발해버리는 유연한 시간”이라고 이야기한다. “불구의 시간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제시간 안에 어떤 일이 일어날 수 있고, 어떤 일이 일어나야 하는지에 대한 우리의 관념을 재상상하거나 ‘얼마나 오랜 시간이 걸리는지’에 대한 기대가 어떻게 아주 특정한 마음과 몸에 기반하는지 인식할 필요가 있다. 불구의 시간이 가진 유연성은 ‘더 많은 시간이 필요한 사람들의 거처일 뿐만 아니라, 속도와 일정에 대한 기대의 규범화와 정상화에 대한 도전으로 이해할 수 있다”고 그녀는 주장한다. 장애있는 몸과 마음을 규범적 시계에 맞추는 대신, 시계를 장애있는 몸과 마음에 맞추는 것이라고 이야기한다. 저자가 말하는 ‘불구의 시간성’을 들뢰즈와 가타리가 말하는 ‘속도’ 개념과 연결지으면 어떠한 일이 벌어질까? 저자가 하려는 것은 들뢰즈와 가타리가 말한 ‘측정단위가 부여된 시간성’을 해체하고 ‘다양체’로서의 시간성을 상상하려는 시도일까? 과거/현재/미래를 ‘점’으로 사유하려는 습관에서 벗어나 그에 속도를 부여하고 '점'을 '선'으로 변형시키며 여러 선들의 얽힘을 주목하려는 시도일까?
저자는 퀴어 시간성 개념을 장애학 관점에서 새롭게 사유한다. 이는 퀴어학의 ‘사본’을 재생산하는 것이 아니라, 퀴어학과 장애학의 마주침과 회절을 통해 ‘지도’를 제작하는 시도이지 않을까? 퀴어학에서 말하는 것을 장애라는 주제에 ‘적용’하는 것이 아니라 퀴어학의 개념을 새로운 맥락에서 사유해봄으로써 그 전까지 전혀 알지 못했던 무언가를 수행하려는 노력 아닐까? 그리고 이러한 지도를 제작하려는 시도는 퀴어학의 ‘다양체’의 본성 자체도 바꿀 수 있는 힘이 있지 않을까?
'불구 퀴어의 시간은 가능한가?'라는 물음을 통해서(86쪽) 규범적으로 정해진 '대문자 미래'를 다양한 '미래들'로 상상할 수 있게 하자는 저자의 주장에 당위적으로 동의하면서도 심정적으로 느껴지는 불편함과 나 자신의 속물스러움에 당혹감을 느끼며 이 책을 읽었습니다.
'자녀를 게이가 될 수 있도록 돕는 방법을 조언할 수도' (130쪽)있다는 것을 읽으면서 몇 년 전 내 아들과 딸이 자신들이 동성애자라고 커밍아웃하면 어떻게 할지를 물었던 게 떠올랐습니다. 당시 나의 대답은 '딸이 그렇다고 하면 인정하고 지지하겠지만, 아들이 그렇다고 하면 그럴 수 없을 것 같다'였습니다. 왜 그랬는지 여전히 모호하지만(아들은 현실적으로 그럴 가능성이 더 높아 보이기 때문에, 성별에 따른 동성애자들의 '생활양식'이 다르기 때문에 등등등), 지금 물어도 여전히 비슷하게 대답할 것 같아요. 선생님들은 성별이 다른 자녀들이 동성애자임을 커밍아웃할 때 어떤 반응을 보일 것 같으신가요?
'장애를 제거하는 것은 세상에 존재하는 대안적 방식들을 발견하는 가능성을 제거하는 것이며, 우리의 상호의존성을 인정하고 그것을 가치있게 평가할 가능성을 배제하는 것과 같다'(219쪽)라는 말에 동의하면서도 제거 그 자체가 문제인가? 제거하는 방식(제거해야 할 이유와 범주를 정하는 과정에서 드러나는 정상성 가정과 이에 따른 억압과 차별의 문제 등)이 문제인가? 하는 의문이 생깁니다. 장애 중에는 피할 수 없는 고통이 수반되는 경우도 많은데, 이를 의료적으로 치료하는 것도 위에서 말한 '장애를 제거하는 것' 에 해당할까요?
글을 읽는 내내 결국 모든 문제(퀴어, 장애, 인종 등)들은 다수 - 소수, 주류 - 비주류의 틀에서 비롯된다는 생각을 했다. 그 틀이 깨질 수 있을까? 다수가 만들어놓은 규칙 속에서는 주류의 삶이 편안하고, 그래서 많은 사람들이 주류에 편입되고자 노력하고, 그렇게 주류를 이룬 사람들은 그 틀을 유지하기 위해 노력한다.
그 주류의 규칙을 깨고 누구나 자기 모습 그대로 편하게 살 수 있어야 하는데, 그 틀이 너무 단단해서 거기에 저항하는 비주류의 삶은 너무 불편하고 피곤(이 두 단어로 설명할 수 없는 수많은 것들이 숨어 있지만)하다. 그래서 그냥 최대한 주류에 편입되고자 노력하는 사람들이 많은 것 같고, 솔직히 나도 그런 노력을 평생 해온 것 같다. 주류의 규칙에 저항하고자 하는 마음과, 그에 대한 고단함 사이에서 어느 위치에 서는 것이 옳을까?
교실에서 장애를 가진 학생들을 매년 만났다. 그 학생들은 특수반과 일반학급 둘 다에 소속되고, 보통 국어와 수학 시간에만 특수반에 가서 수업을 듣고 나머지 수업은 일반학급에서 듣는다. 장애의 정도가 더 심한 학생들은 특수학교에 다닌다. 장애를 극복의 대상이 아닌 차이의 형태로 보고, 그것이 가치 있는 것일 수도 있다는 가능성을 진지하게 받아들이는(218P) 관점에서 생각해 본다면, 현재 한국 초등학교에서 장애아동들에게 제공하는 교육을 어떻게 다르게 상상해 볼 수 있을까? "장애 학생에게 맞추면, 나머지 학생들이 손해를 본다(예를 들어, 소리에 민감한 학생이 있는 교실에서 악기 연주를 아예 못하거나 그 학생은 함께할 수 없는 상황)"는 말은 어떤 말로 대응할 수 있을까?
130p "자녀를 게이가 될 수 있도록 돕는 방법을 조언" 할수도 있다는 ...
131p 퀴어성을 키우거나 이를 지원하는 기관...장애를 양성하는 것...
디즈니와 넷플릭스는 PC주의에 의해 퀴어와 장애인 인물을 꼭 포함시키고 있고, 많은 사람들이 다양한 이유로 이를 비판하는데 이런 시도들이 아이들에게 책에 나온 것과 같은 퀴어성을 키우는 시도의 한 모습으로 볼 수 있을까?
1. 116쪽 등 다수에서 '퀴어하다' '퀴어의 시간' '퀴어하지 않게' 등의 어휘를 사용한다. 퀴어란 사전적으로는 성소수자를 포괄하는 단어이다. 이러한 단어에 동사를 붙여 퀴어하다를 만들고, 이를 쓰는 것을 우리에게 어떤 낯설음과 깨달음을 줄까. 일상생활에서 내가 이 단어를 받아들이고 활용한다면, 어떤 쓰임이 있을 수 있을까?
2. 그동안 나는 당연히 장애를 가진 사람들은 비장애인의 삶을 그리워 하거나 동경할거라 생각해왔다. 이 책을 읽고 '당연하게 여겨왔단 것'이 '강제적,강압적 권력'(125쪽)의 표상은 아니었나 되돌아보게 되었다. 힘의 불균형을 깨닫고, 그것을 바르게 돌려놓는 일은 불편하지만 필요한 일이다. 나 역시 이 책을 읽고 장애인에 대한 컨텐츠를 보며 바라보는 시각이 많이 바뀌었음을 느꼈다. 우리 사회에서도 무언가를 성취해낸 장애인의 일화에 "(장애를 가졌는데도 불구하고) 대단하다" 대신 온전히 "대단하다" 라고 느낄 수 있는 권력의 수평이 올 수 있을까.
+ 읽기 자료 게시판에 1장과 3장의 주석 부분을 스캔해 올려두었습니다~ 책이 없으신 분들 중 주석 내용이 궁금하신 분들은 참고해 주세요!